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암군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신라의 교역로)] 과거에는 영암군 덕진면에 위치한 지역이 [[백제]] 및 [[통일신라]]의 대표적 무역항이었다. 이 덕진은 [[영산강]]으로 연결되어 배를 통한 교통이 발달한 곳으로, 백제 때는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였는데 백제의 [[근초고왕]] 및 근구수왕 시기 [[왕인]]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을 비롯한 학문을 전파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KBS드라마 [[해신(드라마)|해신]]에서도 [[최수종]]이 연기한 [[장보고]]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청해진]]의 대중국 무역의 강력한 경쟁상대로 이곳 덕진에 위치한 채시라의 세력이 이야기의 다른 축으로 비중있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통일신라는 다들 청해진만 알아서... 그래서 영암군 군서면에 왕인박사 유적지가 있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에 속했고, [[침미다례]]의 원래 주도국인 해남군 군곡리 세력이 쇠퇴한 후론 기원후 4세기 중후반 시점에선 해남군 신월리 세력과 함께 바로 이곳 영암군 시종면 세력이 [[침미다례]] 일대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다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정벌 때 별 수 없이 백제의 종주권을 승인해서 간접 지배 아래 들어갔다. 영암군 일대 세력은 끝까지 복종을 거부한 해남군 신월리 세력과는 달리 순순히 백제에게 굽힌 편이지만, 백제는 영암군 시종면 세력을 믿을 수 없었는지 시종면 세력의 분가 격인 나주 반암면 일대를 지원해 키우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후 사비[[백제]]가 옛 마한 거수국을 직할 지배화하던 520년~538년 경 월내군(月奈郡)으로 편성된다. [[신라]] [[경덕왕]] 때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름인 영암군으로 개명했다. 이후 후삼국 시대 때는 주로 나주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한 편이었다. 다만 사비백제 시절부터 나주가 워낙 중요성이 커진 나머지 후삼국 시대 때 '''후백제를 주로 화나게 하던 지역은 나주가 되었기에''', 후백제에게서 피해는 다소 덜 본 편이다. 900년대 초에는 [[궁예]]가 점령하였다. 901년에는 후백제가 잠깐 점령했으나 902년에 왕건이 탈환했고, 908년에 후백제가 또 빼앗았으나 역시 얼마 못가 909년에 왕건이 재탈환한다. 918년 [[고려]]가 건국되면서 군사적인 요충지로 중요시 되어 진주(鎭州)가 되었다가, 929년에는 후백제에게 함락된다. 이후 935년도에 고려가 후백제에게서 다시 빼앗으면서 최종적으로 고려 영토로 확정된다. 995년(고려 성종 14) 낭주군(朗州郡)[* 영암을 본관으로 하는 [[낭주 최씨]]의 '낭주'가 이것.]이라 개칭하였다가 다시 1096년(현종 9) 영암군이 되었다. 1906년 [[나주시|나주]] 관할인 금정면, 시종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11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79년 5월 1일 영암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2003년 4월 1일 삼호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