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어/대한민국 (문단 편집) == 역사 == [[https://pgr21.com/pb/pb.php?id=humor&no=310851|고종의 영어교육 vs 일본의 영어교육]] > '''I do not understand one word that you say.'''(저는 당신들이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 > - [[1816년]] 영국선 맥스웰 함장의 조선관리 접촉기 ([[조선]]에 처음 들어온 영어다.) 1816년 [[영국]]의 맥스웰 함장의 글씨가 최초의 영어 접촉이다. 당시 [[조선]]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그들을 돌려보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797년에 영국 해군 브로턴의 프로비던스 호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알파벳|라틴 문자]]를 처음 접한 조선 관리의 반응은 이랬다고 한다.[* 단 이게 동시에 '''최초로 본 [[로마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에 상륙한 [[박연#s-2|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하멜]]과 접촉을 하면서 로마자를 봤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하멜이 조선에 표류됐을 때 제주목사 이원진이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라고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br][授筆使書, 則形如雲山圖畫, 不可曉得.][br] 그리고 그로부터 66년 후 [[고종(조선)|고종]]이 [[미국]]과의 수교를 결정했을 때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 현재 [[한국]]의 영어 교육에 맞먹는 엄청난 교육이 시작되었다.''' 영어는 [[고종(조선)|고종]]의 관심에 따라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1885년의 '육영공원'의 설립부터다. 원어민 강사를 국가의 요청으로 [[미국]]에서 유능한 학력자들을 초빙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초반에는 60여명의 학생으로 시작해서 점점 늘었다고 하며, 그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여러 사립 학당이 세워지고, 조선 사람들의 영어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서 너도나도 영어를 배우려 노력했다고 한다. 영국인 새비지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이라는 책에서 "이 19살 조선 청년이 f랑 p의 발음도 구분 못하더니, 두달이 지난 지금은 하루에 단어를 200개씩 외우고, 영어 해석과 회화도 완벽함 너무 놀라움" 이라고 했을 정도(…) 이유는 영어를 배우면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 예로 [[배재학당]]의 당시 교장이였던 [[아펜젤러]]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조선 사람에게 왜 영어 공부를 하냐고 물으면 변함없이 '[[출세]]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예는 당시 부산에서 찹쌀떡 장사(여러가지 설이 있지만)로 시작했던 [[이하영]]은 알렌이라는 의사를 만나 영어를 배워 그의 [[통역]]이 됐는데, 그가 왕실 의사로 임명되자 그도 관직에 올라 미국 공사관 서기가 되고, 마지막엔 [[외무대신]]까지 올랐다고 한다만[[친일파|.....끝이 영]]. 그리고 [[을사조약]]에 의한 [[일제강점기]]의 시작으로 영어 교육이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강사가 일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법'''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어 강사들은 일본인으로 채워졌고, 발음이 안좋은 일본인 강사 아래서 배운 그들은...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는 발음이 엉망이라 수업이 잘 안됨, 차라리 조선인 강사로 바꾸어 주세요."이라는 이유로 단체로 수업을 거부하는 일이 '''흔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 현재의 교육인 문법 독해 위주의 수업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고등학교]] [[입시]] 시험(영어 위주)에서 떨어져서 절망하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학생들의 눈 건강을 위하여 영어를 폐지하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러던중 [[일본 제국|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진주하여 [[신탁통치]]를 하면서 현재의 영어 교육이 완성되었다. 영어교육학의 관점에서 조선시대에는 영어교육시에 [[직접식 교수법]](Direct Method)이 사용되었고, 일제치하에서는 [[문법 번역식 교수법]](Grammar Translation Method)이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오랜기간 문법 번역식 교수법이 이어졌다. 1950년대 구조주의 언어학에 힘입어 1980년대 [[청각 구두식 교수법]](Audio Lingual Method)이 잠시 소개되었고, 1980년대 후반 등장한 의사소통기반 [[언어 소통 교수법]](Communicative Language Teaching)이 대세가 된 이후 1990년대 들어서는 의사소통 강조로 이어지는 등 국민적 관심에 힘입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문제는 [[라틴어]]나 중세[[그리스어]]같은 사어를 위해서 개발된 문법 번역식 교수법이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표준적인 교습방법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에 있단 거다. 이 교수법은 소리가 사라지고 문자만 남은 사어를 학습하는 목적이라면 매우 우수한 교습법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의사소통 중심으로 교과서가 개정되는 듯 변화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정부 방침과는 달리 각 학교의 영어 교사들이 이러한 의사소통 중심 수업을 해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교사의 능력 부족 혹은 지나치게 많은 학생 수, 그리고 교과서 역시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등 입시와 관련된 제약이 많아 실제 의사소통을 담기보다는 '''정형화된 문법학습'''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교수법의 문제는 세계의 영어교수 흐름에 역행한다고 볼 수 있다. 각국의 영어교육은 의사소통기반 언어교수에서 더욱 발달한 과업중심 언어교수(Task-Based Language Instruction)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들이 실생활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과업을 수행하면서 그 속에서 의미협상(negotiation of meaning)과 진정성 있는 언어(authentic languages), 즉, 언어의 기능(function) 표현을 학습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법 위주의 교수, 청각 구두식 교수법에서 강조하는 전형적인 행동주의식 교육(반복과 모방을 통한 올바른 언어패턴 습관형성)이 고착화 되어 있기 때문에 실생활과 연계된 언어 습득은 물론, 학습동기 부여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또한 교육부에서 실생활 중심 영어교육을 표방하여 의사소통 중심 교수를 권장하고, 실제로 중등교사 임용경쟁시험 전공 영어 2차 선발단계의 경우에도 수업실연과 교실상황 면접을 영어로 실시하고 있지만, 문법 주입식 교육 방법으로 영어를 배운 교사가 이를 실행하기는 어렵다. 교과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수능에서 주로 사용될 영어 패턴과 독해 지문을 중심으로 구성된 교과서를 가지고 의사소통 중심 교육을 수업시간에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각 교과서 출판 업체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과업용 자료를 덧붙이고 있지만, 사실은 문법에 맞추어 단어를 채워넣는 식의 기계적 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런 문법이 맞는 것도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