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원회귀 (문단 편집) == 관련된 니체의 주요 어록 ==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이야기하겠다.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라는 '''그 도달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은 ㅡ 1881년 8월의 것이다 : 그것은 "인간과 시간의 6천 피트 저편"이라고 서명된 채 종이 한 장에 휘갈겨졌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사실 나는 괴테가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모태가 되는 주신제와 같은 것을 그리스적 영혼의 가능성들로부터 원칙적으로 배제해버렸으리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괴테는 그리스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적 비밀제의에서야,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심리학에서야 비로소 그리스적 본능의 근본적인 사실, 즉 '생에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은 이런 비밀제의에 의해 무엇을 보장했는가? 영원한 삶, 삶의 영원회귀였다. 과거 속에서 약속되고 신성시된 미래였다. 죽음과 변화를 넘어서 있는 삶에 대한 의기양양한 긍정이었다. 그리고 생식과 성의 신비를 통한 총제적 생명의 존속으로서의 진정한 삶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에게 성적 상징은 경외할 만한 상징 자체였고, 모든 고대적 경건성에 내재한 심오한 의미였다. 생식ㆍ수태ㆍ출산의 행위에 속하는 세부적인 하나하나의 일이 최고의 엄숙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비밀제의의 가르침에서는 고통이 신성한 것으로 선포되고 있다. '산모의 통증'은 고통 일반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ㅡ 모든 생성과 성장, 미래를 보증하는 모든 것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창조의 기쁨이 존재하려면, 삶에의 의지가 자신을 영원히 긍정할 수 있으려면, '산모의 고통'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디오니소스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그리스적 상징, 디오니소스 축제의 상징보다 더 고귀한 상징을 알지 못한다. 그것에서는 삶의 가장 깊은 본능, 곧 삶의 미래와 삶의 영원성을 향하는 본능이 종교적으로 체험되고 있다. 삶으로 향하는 길 자체가, 곧 생식이 신성한 길로 체험되고 있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74~175] >나는 오르고 또 올랐다. 오르면서 꿈도 꾸었고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극심한 고통에 지쳐 있는 차에 한층 고약한 꿈 때문에 놀라 잠에서 깨는 병자 같았다. 그런데 내 안에는 내가 용기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 모든 낙담을 죽여왔던 바로 그것이지. 이 용기가 마침내 내게 걸음을 멈추고 말을 하라고 명했다. "난쟁이[* 난쟁이는 니체가 '중력의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삶을 무겁게 만드는 모든 것을 말한다.]여! 너! 아니면 나다!" >그러니까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모든 공격 속에는 진군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용기 있는 짐승이다. 바로 그 용기로 인간은 온갖 짐승을 넘어섰다. 진군의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인간은 온갖 고통마저 극복했다. 인간의 고통이야말로 가장 깊은 고통인데도.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도 죽인다. 그런데 인간이 서 있는 곳치고 심연 아닌 곳이 있던가! 본다는 것 자체가 심연을 보는 것이 아닌가?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그것은 동정도 죽인다. 그런데 동정은 가장 깊은 심연이다. 삶을 깊이 보는 것만큼 인간은 고통도 깊이 본다. 하지만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이 용기는 죽음마저도 죽인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를 죽이고 '새롭게 변화된 나'로 웃으며 다시 태어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과거의 고통을 마주보아야 하기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거부하고 나 자신을 온갖 불행에 내맡기는 선택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말에서는 진군의 나팔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진다. 귀 있는 자, 들을 지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20~321] >내가 "위버멘쉬"라는 말을 길에서 습득한 곳, 인간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습득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것을 습득한 곳, 새로운 아침놀에 이르는 길로서, 자신의 정오와 저녁 덕택에 스스로를 찬양한다는 것을 습득한 곳도 그곳이었다. 위대한 정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습득한 곳, 그 외에도 내가 두 번째 자줏빛 저녁놀처럼 사람들 위에 내걸었던 것을 습득한 곳도 그곳이었다. 진정 나는 새로운 밤과 더불어 새로운 별도 저들이 보게끔 해 주었다. 나는 웃음을 구름과 낮과 밤 위에 오색찬란한 장막을 치듯 펼쳐놓았다. 나는 저들에게 내가 심혈을 기울였던 것 전부를 가르쳤다. 인간에게서 파편이고 수수께끼이자 가공할 우연인 것을 하나로 압축하고 집약하는 것을. 시인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우연의 구원자로서 나는 저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것 전부를 창조를 통해 구원할 것을 가르쳤다. 인간에게서 과거를 구원하고 모든 "그랬었지!"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기를 나는 원할 것이다!"라는 의지의 외침에 이르기까지 변모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이라고 나는 저들에게 알려주었고, 그것만을 구원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405] >고통 또한 기쁨이고, 저주 또한 축복이며, 밤 또한 태양이니. 그대들은 꺼져버리든지 아니면 배우든지 하라. 현자 또한 바보이니. 그대들은 일찍이 하나의 기쁨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내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또한 모든 비애에 대해서도 '그렇다'라고 말한 셈이다.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으며, 사랑에 빠져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한 번, 또 한 번'을 원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일찍이 "네가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빠져 있다.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그대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비애에 대고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라!"라고 말하라. 모든 기쁨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 >기쁨 일체는 모든 것이 영원하기를 원하고, 꿀을 원하고 효모를 원하며, 취해 있는 자정을 원하고, 무덤과 무덤의 눈물 어린 위안과 황금빛 저녁놀을 원한다. 기쁨이 무엇인들 원하지 않겠는가! 기쁨은 모든 비애보다 더 목말라 있고, 더 진심이며, 더 굶주려 있고, 더 섬뜩하고, 더 은밀하다. 기쁨은 자기 자신을 원하고, 자기 자신을 물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둥근 고리의 의지가 애를 쓰고 있다. 기쁨은 사랑을 원하고, 미움을 원한다. 기쁨은 넘치도록 풍요로워 선물을 하고, 던져버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애걸하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감사한다. 기쁨은 기꺼이 미움받으려 한다. 기쁨은 비애를, 지옥을, 미움을, 비방을, 불구를, 세계를 갈구할 정도로 풍요롭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오, 그대들은 이 세계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 좀 더 높은 인간들이여! 기쁨은, 그 억제하기 어려운 복된 기쁨은 그대들을 동경한다. 그대들의 비애를 동경한다. 그대 실패한 자들이여! 모든 영원한 기쁨은 실패자들을 동경한다. 모든 기쁨은 자기 자신을 원하며, 그 때문에 심장의 고통 또한 원하기 때문이다! 오, 행복이여, 오, 고통이여! 오, 부서져라, 심장이여! 그대 좀 더 높은 인간들이여, 배우도록 하라. 기쁨이 영원을 원한다는 것을. 기쁨은 모든 것의 영원을 원한다. 깊고도 깊은 영원을!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632~634]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또 끝날 것이다. ㅡ 네가 생겨난 모든 조건들이 세계의 순환 속에서 서로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사이의 위대한 순간의 시간, 그 다음에 너는 모든 고통과 모든 쾌감과 모든 친구와 적과 모든 희망과 모든 오류와 모든 풀줄기와 모든 태양빛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를 되찾을 것이다. 네가 하나의 낟알로 들어 있는 이 고리는 항상 다시 빛난다. 그리고 인간 존재 전체의 모든 고리 속에는 항상 어떤 순간이 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단 한 사람에게,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생각, 즉 모든 것의 영원회귀라는 사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ㅡ 인류에게 이때는 매번 정오의 순간이 된다. >---- >니체전집 12 /KGW V 2, 11[148], p.498 >최대의 중량 ー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ㅡ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ㅡ 티끌 중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 ㅡ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대는 악령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그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킬 것이며, 아마도 분쇄시킬 것이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 >니체, 《즐거운 학문》 341절 >나처럼 어떤 수수께끼 같은 갈망을 가지고 염세주의를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사유하면서, 염세주의를 마침내 금세기에 쇼펜하우어 철학의 형태로 나타났던, 반쯤은 그리스도교적이고 반쯤은 독일적인 편협함과 순진함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랜 동안 노력해왔던 사람, 아시아적이거나 초아시아적인 눈으로 온갖 사고방식들 중에서도 가장 세계 부정적인 사고방식의 정체를 ㅡ 부처나 쇼펜하우어처럼 도덕적인 속박이나 망상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선악의 저편에서 ㅡ 꿰뚫어보고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내려다본 사람은 아마도 바로 이로 말미암아 전혀 의도치 않게 정반대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은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無)는 같다"고 말했는데, 니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그릇은 그 본질이 비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허무하다거나 외롭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따라야할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은, 모든 가치에 대해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이상이란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이 넘치며 극한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이다. 그러한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그것과 화해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다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인생의 연극과 구경거리 전체 뿐 아니라 바로 이러한 구경거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또한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야말로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부르짖는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거듭해서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고 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구경거리는 허무에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자기 자신은 필요할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필요한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삶이 필요하다. 즉, '삶에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말은 [[순환논증]]이라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그런데 필요에 의한 이 순환논증은, 사실 철학의 제1원리인 '실체(신)'를 증명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악순환의 신)] 뭐라고? 이것이야말로 악순환의 신(circulus vitiosus deus[* 여기서 악순환이란, 스콜라철학의 자기원인(Causa Sui)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것의 첫번째 원인이 될 수 있으려면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바뤼흐 스피노자|스피노자]] 참조) 그리고 스콜라철학에서는 모든 것의 첫번째 원인인 이 '실체'를 '신(deus)'이라 부른다. 니체는 영원회귀 하는 '인생 그 자체'가 철학의 제1원리인 '실체', 곧 '신'의 설명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니체의 철학에서 '신'은, '매순간 반복되는 인생'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일찍이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으므로 우리 자신이 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우리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외치는 것'''. 이것이 우리 자신이 신(가치의 창조자)이 될 수 있는 필요 조건이고, 신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이 아닌가? >---- >『선악의 저편』 56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3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