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일동맹 (문단 편집) === 배경 ===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대영제국]]과의 1세기 가까이 끌어온 [[그레이트 게임]]으로 남하 계획이 번번히 막히자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었다. 러시아는 기존의 튀르키예, 흑해 및 중앙아시아 방향으로의 진출을 사실상 포기하고 대신 [[만주]]와 [[한반도]]라는 새로운 거점 확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당시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했고 이어 만주에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만주의 군사적 점령을 시도했으며 [[랴오둥 반도|요동 반도]]에서 [[다롄]]과 [[뤼순]] 항 및 동청철도(東淸鐵道 - [[하얼빈]] [[철도]]의 예전 이름)를 건설하여 남하를 시도했다. 또한 한국에서도 [[마산]]포, [[용암포]], [[절영도]][*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를 조차(租借)하려 하거나 조선에서 [[제주성 위협사건]], [[아관파천]] 사건과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노골적으로 친러 세력을 침투시켰다. 한편 일본은 반대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숙원이었던 '대륙 진출'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 제국은 한반도 점령을 시작으로 만주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일본 제국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 시점부터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의 도전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장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뱉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만주의 이권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국의 이권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기본 입장을 러시아에 표명하였다. 이에 영국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히 러시아의 팽창을 동아시아에서도 저지하려 했다. 이전에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하자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진출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 적이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만주]],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욕심을 알아챈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1899년 [[미국]]의 헤이 국무 장관 역시 문호 개방을 주장하여 당시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만주와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었다. 1902년 1차 영일동맹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여 [[1905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미국과도 대러 협조를 위한 각서를 체결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것이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이 끝내 감당하기 벅찬 러일전쟁 전쟁 비용[* 일본 정부 예산이 2억 5천만 엔에 불과했을 때, 전쟁 비용은 무려 8년치 예산에 달하는 20억 엔이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 진 빚은 1986년에 다 갚았다.]의 충당을 위해서 만주에서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을 독점하는 조치를 취하자, [[미일관계|미일 협력 관계]]는 무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