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일동맹 (문단 편집) == 영향 == 결국에는 폐기가 되었다고는 하나 해당 동맹을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세력 균형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 일본의 조선 점령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만주 장악까지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득을 다 본 뒤, 1차 대전에서 전시 호황을 통해 채무를 완전히 청산하는 행운까지 뒤따랐다. 아직 산업화의 기초가 부족했었던 일본에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운 사태 전개는 [[제2차 세계 대전]]시 일본 제국의 [[추축국]] 가담에 이르는 과도한 자만심을 낳았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의 양대 축인 일본 해군을 세계 제3위의 해군으로 급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러일전쟁에서 최신예 영국 군함을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 해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적 기반은 영국 해군이 기준이 되었으며, 이런 관계는 사실상 일본의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초석이 되는 [[공고급 순양전함]]의 판매와, [[항공모함]]에 적용되는 많은 기술을 입수하는 것까지 진행되었다. 만일 영일동맹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일 내에 일본 해군이 급성장을 하기 어려웠다. 1931년 [[만주 사변]]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일본을 비호했지만 1936년의 [[방공협정]]과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양국의 관계는 빠르게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직후, 폭격을 퍼부은 뒤 [[홍콩섬]]에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켜 [[구룡반도]]를 통해 5만 대군을 투입,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을 패퇴시키고 [[홍콩일치시기|홍콩을 점령했다.]][* 중일전쟁 때는 중국과 일본 양측 모두 전시 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일부러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정식 전쟁이 아닌 사변으로 교전을 진행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에 가서야 중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때문에 전시 규제를 받지 않고 모든 물자가 중국에 자유롭게 수입될 수 있어서, 일본은 중국의 물자 보급 루트인 홍콩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싱가포르]], 말라카 등의 말레이 연방 식민지들도 모두 점령함으로써 영국과 일본은 적으로 돌아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