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조/생애 (문단 편집) === 왕자 시절, 왕세제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조 청년 시절.jpg|width=100%]]}}} || || {{{#gold ''' 연잉군 시절 영조의 젊은 모습 (21세) '''[* 오른쪽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에 불에 탔기 때문이다.]}}} || [[숙종(조선)|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연잉군(延仍君)'''으로 책봉받았다. 이후 [[경종(조선)|세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노론]] 대신 [[김창집]], [[이이명]] 등은 [[숙종(조선)|숙종]]이 "아이고 내가 눈도 잘 안보이고 골골해서 왕 노릇 못하겠다. [[대리청정]] 어떠냐?"라고 말을 꺼내자 대찬성 하며 [[경종(조선)|세자]]의 대리 청정을 지지했는데, 이에 윤지완을 비롯한 [[소론]] 대신들이 머리풀고 궁궐 대문 앞에 꿇어 엎드려 머리 풀고 도끼 상소까지 하면서 격렬한 반대를 하지만 [[숙종(조선)|숙종]]은 말을 가려 하지 않았다고 혀를 찰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후일 [[경종(조선)|경종]]이 되는 세자의 대리 청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경종(조선)|세자]]는 공은 없어도 실책도 하지 않으며 [[왕세자|세자]] 자리를 유지했고 독특한 처신으로 [[노론]] 대신들에게 꾸지람까지 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숙종(조선)|숙종]]의 병환이 나빠짐에 따라 [[세자]]의 자리는 굳건해졌고, 숙종 말년에 [[경종(조선)|세자]]가 승지(丞誌)들이 자신을 기다리게 해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숙종(조선)|숙종]]이 [[경종(조선)|세자]]를 질책하자 [[소론]] 대신들이 "왜 세자의 기를 죽이느냐?"고 반발할 정도였다. 이는 일부 [[노론]]조차도 동의 할 정도이었다.[* 상황을 볼 때, 이유없는 꼬장이라기보다는 이유가 있는 분노이기도 했고.]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왕 [[숙종(조선)|숙종]]은 "내가 세자 아빠인데 어디서 감히 이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너무 병환이 심해져서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결국, [[숙종(조선)|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이복형 [[경종(조선)|경종]]이 [[조선/왕사|승계]]한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은 초반부터 즉위한 [[경종(조선)|경종]]을 우습게 알면서 갖은 모욕적인 처사를 했으며 마침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강제로''' '왕세제(王世弟)'로 삼게 했다. 경종이 아들이 없었으되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선의왕후|왕후]]가 고작 17세인 것을 감안하면 아들을 낳지 못하니 [[삼종의 혈맥]]을 근거로 동생(연잉군)이나 후계자 삼으라고 [[조선/왕사|왕]]을 능멸한 것이다.[* 참고로 [[선조(조선)|선조]] 시절에는 [[정철]]이 아들을 세자로 삼을 것(건저 문제)을 건의했다가 "내가 아직 젊은데 이게 장난하냐?"라고 처참히 [[개발살|개박살]]이 났고, 후일 [[홍국영]]도 정조 시절에 양자를 제멋대로 들이고 국정을 무단으로 전횡 하다가 끝장났다.] 각설하고, 이때 [[왕세자|왕세제]]가 된 연잉군은 공부에만 힘을 썼으나, [[노론]]은 [[경종(조선)|경종]]을 아예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연잉군에게 [[대리청정|대리 청정]]을 시킬 것을 완곡히 권했고 경종이 받아들이면서 결국엔 [[신임옥사]]의 난리가 난다. 우여곡절 끝에 [[노론]]은 지네가 역당이라는 것을 인증한 꼴이 되었으나, 세제(연잉군) 본인은 사양도 했었고, 유일한 혈육이다 보니까 무사했었다. 오히려 세제는 [[경종(조선)|경종]]에게 청해 자신을 음해하려는 궁인들이 있다고 아뢰어 내시 박상검, 문유도 등을 지목하고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경종은 거부했다. 그러자 세제는 경종에게 그럼 "그 [[노론|사악한 내시들]]을 전하 곁에 두면 되겠군요" 라고 말했다가 형 경종에게 [[쌍욕]]을 듣기도 했다.[* 《[[경종실록]]》에서는 세제에게 경종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렸다고 나온다. 이는 왕이 부적절하게 [[쌍욕]]을 했을 때 《[[조선왕조실록]]》에서 쓰는 일종의 필터링이다.] 이에 세제는 "사악한 자들이 나를 해치려 하니 세제 노릇 못 해먹겠다"며 [[배수진|세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포했다.]] 이에 놀라서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 신하들도 박상검, 문유도를 처벌한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정치적 입장이 어쨌든 세제 대신에 내시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결국 [[경종(조선)|경종]]은 자신이 총애하던 내시 박상검, 문유도 등을 처형해야 했고, 그들과 체결하여 웃전의 사정을 살핀 [[궁녀]] 석렬과 필정도 자결했다. 이렇게 세제는 정치적 위기를 정면 승부로 돌파하는 듯했는데 [[삼수의 옥]]이 터지면서 그는 반란 수괴로 몰리고 정말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김일경 등은 김성 궁인을 캐낼 것을 요구하며 세제를 공격했고, 세제는 "이런 죄인이 어찌 세제의 자리에 있겠냐"고 눈물로 호소하며 세제 자리를 벗게 해달라고 청할 뿐이었다. 하지만 [[경종(조선)|경종]]이 유일한 혈족인 세제(금)를 보호한다. 결국 31세의 나이로 이복형이었던 [[경종(조선)|경종]]이 오랜 숙환으로 [[죽음|승하]]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견딘 연잉군은 '''드디어 [[조선/왕사|왕]]으로 즉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