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조/생애 (문단 편집) === [[경종 독살설]] === [[경종(조선)|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조그만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일절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해지는 [[야사(역사)|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이복형인 [[경종(조선)|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 때 사용된 음식이 [[감|생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1755년에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 경종이 죽은 해인 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1755년 신치운의 심문 과정에서 나온 말. 헌데 이 말은 1725년 이천해의 공초에서 영조가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기록되지 못했던 말과 같다고 한다. 그 때는 즉위 초의 대사건이라 사관도 어지간히 겁이 났는지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설설 기었다.][* 영화 <[[사도(영화)|사도]]>에서 잘 구현해냈는데 국문에 끌려온 [[죄인]] 하나가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란 말이오!"라며 소리치자 영조가 "25년이나 지났는데 지겹지도 않냐"라며 죄인 2명의 [[거열형|입을 찢으라]]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문이 끝난 후에 영조가 귀를 물로 씻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형을 꺼렸던 영조가 입까지 찢으라 했으니 본인도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만큼은 어지간히 [[스트레스]] 받았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조선시대]] 표현으로 하자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리는 다 안다!" 등 대놓고 개겼다.[* 이상하게도 [[조선]] 초 [[사육신]]을 빼면 《[[세조실록]]》에 따르면 [[사육신]]조차도 역모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자기 죄를 시인하며 고분고분하게 굴어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친국에서도 개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1755년 나주 괘서 사건 이전에도 "[[김일경]]의 [[상소]]를 보고서야 충성이고 뭐고 충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를 [[역적]]이라고 하냐?"고 왕에게 바락바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었고 김일경도 매를 맞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무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항변했다. [[정조(조선)|정조]] 시기에는 아예 스스로를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칭하면서 [[정조(조선)|정조]]를 왕 대우 안하고 개기는 죄인들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경종(조선)|경종]]은 병세가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랏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 《영조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식욕]]이 돋아 잘 먹었다고 한다. 게장과 감은 오늘날에도 음식 궁합 이야기할 때 최악의 궁합 중 하나로 자주 이야기되는 [[메뉴]]다. 좋게 생각하면 식욕이 없는 경종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올리다 보니 음식 궁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병약한 경종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감과 게장을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 게장은 기본적으로 직접적 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중독]]이나 [[기생충]] 감염을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이다. [[게]]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거나 게장에 쓰일 [[간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현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을 정도. 거기에다 고[[단백질]], 고[[나트륨]] 음식이기까지 하니 게장은 소화력이 현격히 저하된 와병 중인 [[환자]]에게 먹일만한 음식은 아니다.]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투구꽃|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자는 잘만 쓰면 좋은 약이지만 흔히 [[사약]]의 원료로 추정되는 강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다. 지금도 해마다 제대로 처방없이 부자를 달여먹다가 죽는 사람이 간혹 나온다. 물론 [[임금]]에게 올려야하니 당연히 [[어의]]들도 정성스레 추출하고 정제를 했겠다만 그 특유의 독 [[이미지]] 때문에 독살설 지지자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본 것은 자명한 일. 사약을 넣을 때 인삼을 넣었다는데 부자는 [[열]]을 받아야 최고로 활성화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인삼과 부자를 복용한 일시적인 효과일 뿐, 당장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보다 더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직접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경종 독살설|독살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신임옥사|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기는 하다. [[경종 독살설]]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 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울다 지쳐 나가 떨어져서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는 말을 못한 바람에 소론과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영조실록》에 적혔다.] 영조는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 것이 많았는지 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서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경종(조선)|형님]]께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https://youtu.be/qcGmThWrrvA?t=282|글까지 쓴다.]][* 《천의소감》은 영조(연잉군)가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즉위할 때부터 [[나주 괘서 사건]]까지 정치적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책의 집필 목적이 영조의 [[조선/왕사|정통성]]을 밝혀서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경종 독살설]]을 변론하기 위한 변명 가득한 책이다.] 그러나 당시는 임금의 주장에 쉽게 반박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세제였던 영조는 [[신임옥사]]로 인해서 이복형 경종을 죽일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단 몇 해 전에 그나마 자신의 지지 세력이였던 [[노론]]들이 대거 죽거나 쫓겨났으며 출생에서부터 천출이라는 차별[* 그나마 숙종의 살아있는 아들이 [[연령군]]이야 일찍 죽었고 당시 경종과 영조가 유일했다. 이것만 아니였다면 적서에 대한 차별이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무수리의 아들을 [[왕]]으로 올리자는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후궁]]들도 [[양반]] 가문에서 선발하였고 궁인 중에서 되더라도 [[상궁]]-나인들은 상민 이상 계층에서 선발된다. 궁인의 잡역을 위해 고용된 [[무수리]]가 후궁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비록 '왕세제(王世弟)'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고 따를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 직전 중용된 많은 [[소론]]계 중신들은 신임옥사 당시 노론을 쫓아낸 사람들이였으며 경종 사망의 진상을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약 경종이 독살되었다면 이들이 영조에게 신하로서 충성했었을리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