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조/생애 (문단 편집) === 집권 중반기, 쌍거호대 === 이후 영조는 당파 싸움을 뿌리 뽑자는 취지로 [[소론]]의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등과 노론의 홍치중, 홍치중 사후엔 김재로 등을 중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균형을 맞추는 쌍거호대 정책을 유지한다. 하지만 깊어진 적대감으로 인해 유척기를 비롯해서 [[탕평책|탕평]]에 응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탕평파 중에서도 강경파인 이광좌는 [[노론]]의 공공의 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인]]과 [[소론]] 강경파가 끊임없이 반역을 도모하면서 영조는 싫어도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어쩔 수 없이 계속 처형해야 했고 [[1755년]](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최후의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의 친림 시험장에 나타나서 영조에게 최후의 발악까지 했다. 결국에는 살아남은 [[소론]] 강경파는 반역 전문 집단쯤으로 몰려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고 열받은 영조조차 조태구, 유봉휘를 역률로 추죄하고 조태억, 최석항, 이광좌도 관직을 추탈하면서 [[소론]]의 세력을 온건파 수준으로 줄이게 된다. 한편 [[노론]]은 [[신임옥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이때 영조도 역안(逆案)에 써진 마당이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저절로 [[노론]]의 힘을 싣게 되는 행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생각은 왕세제 시절에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뻔했던 [[신임옥사]]에서 본인의 죄를 사해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지, [[노론]]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조가 [[신임옥사]]에서의 신원이 본인을 위해 한 목적이었음을 밝혀지게 된 것은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지어 세제 책봉에서의 취약한 [[조선/왕사|정통성]] 등 문제점을 변명하려 했다. 이 때는 조정에서 이미 강경파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영합에 맞추는 온건파 일색이었다. 그래도 [[세도정치]] 시절과 다르게 당파색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지, 거리낄게 없어보였던 [[노론]]은 마음껏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오히려 영조에게 분노를 샀다.[* 영조는 "이 미친 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라는 일갈을 했다.] 결국에는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영조 자신과 정치의 안정을 위한 서적 간행을 다시금 정치 보복에 써먹으려던 [[노론]]에게 잠시 겁을 준 것이다.[* 애초에 영조가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편찬한 것도 [[경종(조선)|경종]]조의 역모에 연루된 자신을 신원하고 [[조선/왕사|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일종의 의리명변용으로 편찬한 것인데 노론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천의소감을 자파의 의리를 세우는데 정치적으로 써먹으려하니 더욱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영조는 [[선조(조선)|선조]] 시절부터 [[붕당]]을 주도하고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림]] 세력들에 대한 정리를 시작하였고 사림과 붕당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서원]]을 감소시키는 한편, [[사림]] 출신의 관직 등용을 줄였다. 그 바람에 [[숙종(조선)|숙종]] 시절만 해도 영향력이 강했던 전통적인 사림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 덕분에 지방 사림 출신들이 줄어나가는 반면, 서울(한성)과 경기 출신에게 관직이 많이 주어져서 이후에는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한 관직 독주가 이어지게 되었다.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조정에 온건파들만 남자 영조는 자신의 영합을 위한 정치에 맛을 들였다. 영조는 한미하지만 외척이면서 똑똑한 노론 가문인 [[풍산 홍씨]]를 두루 중용한다. [[풍산 홍씨]]의 수장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어른이자 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 즉, 영조의 사돈이자 [[정조(조선)|정조]]의 외할아버지.] 종9품 말직에서 7년만에 종2품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으로 진급을 거쳐 좌상, 영상을 역임하며 조정 최고의 권신이 되었다. 이것이 정조 즉위 후 [[홍국영]] 등의 집권 배경이 됐으며 [[세도정치]]의 물꼬를 터서 [[조선]]이 멸망 테크를 제대로 타게 만든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이후에 상술했듯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만 남자 붕당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고 조정에서 쌍거호대는 사라졌으며, 온건파들만 모인 탕평당의 1당 독재가 되고 말았다. 겉으론 붕당이 유지되고 있지만 실상은 탕평당의 독주가 이어졌다. 이렇게 왕에게 아부하는 예스맨의 탕평당들이 조정을 채우면서 정치 안정을 이루게 되었고 붕당은 남아있었지만 사실상 탕평당을 위한 1당이었기에 왕에게 아부하는 무리라서 당색이나 의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영조는 정비인 [[정성왕후|정성왕후 서씨]]가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64세에 [[사망]]한 후에도 생존해있었다. 그래서 새 장가를 들어야 했다. 이 때 계비로 들어온 사람이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영조는 [[조강지처]] 정성왕후의 친족인 [[대구 서씨]] 일족은 본체 만체 했지만, 정순왕후의 일족인 [[경주 김씨]] 처족들을 중용했다. 그래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잠깐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김귀주는 너무 기분을 낸 나머지 실세 [[홍봉한]]까지 목을 날리려다 실패하여 영조의 분노를 사서 [[함경도]] [[리원군|이원]]으로 유배간 일도 있었다. 김귀주는 유배가 풀린 후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 등과 연합한 [[홍봉한]]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수(조선)|김종수]] 등과 함께 청명당을 이뤄 맞서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