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조/생애 (문단 편집) === 집권 말기, 사망 === [[사도세자|세자]]가 죽은 이후 영조는 [[정조(조선)|세손]]을 정식 [[동궁]](東宮, 세자/세손 등 차기 왕위계승자)으로 삼았고 그를 [[조선/왕사|후계자]]로 보호했다. 영조는 말년에 몇 달마다 [[영의정]]을 갈아치우는 등[* 1년에 세 명을 10번이나 [[영의정]]에 제수했다. 다만 김상복, 신회는 말기에 재임할 때에는 1년 이상 재임했다.] 더 외골수적이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자주 보였으며 [[현지지도|동시에 수천 명의 백성을 만나보는(격쟁) 등]] 여러 가지 행보를 이어갔으나 뚜렷한 업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편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외손자인 [[정조(조선)|세손]]을 당연히 보호하며 자신들이 후원자임을 자처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의 젊은 선비들이 소위 청명당(淸明黨)이란 그룹을 이뤄 [[성리학]]에서 엄히 금지하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건전한 붕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정치 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 척신이되 깨끗한 척신을 자처하는 [[경주 김씨]]로 대표적 인물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었다. [[풍산 홍씨|홍씨 가문(풍산 홍씨)]]은 [[정조(조선)|세손]]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우 불안해하며 보험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삼왕손(三王孫)[*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으로 당시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아닌 [[사도세자]]의 [[후궁]]에게서 난 자식들을 말한다.]에게 연줄을 대고 있었다. [[홍봉한]]은 [[경주 김씨]]들이 꽤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하려고 영조에게 [[경주 김씨]]를 중용할 것을 청하지만 영조는 "우리 [[정순왕후(조선 영조)|마누라]]가 어질어서 안된다."[* [[경주 김씨]] 일파를 등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외척을 중용하는 것이라며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가 직접 반대했다.]라고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은 천거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1770년]](영조 46년)에 십수 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난다. 이에 빡친 [[홍봉한]]('''북당''')과 [[김귀주]]('''남당''') 측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왕손들([[은언군]], [[은신군]])이 유배를 가는 등 정국은 혼란해졌다. 그러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치는 [[탄핵]] 상소를 올린 것을 읽은 영조가 저 난장판이 다 김씨와 홍씨간의 정쟁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열받은 나머지 청명당과 [[경주 김씨]]를 모조리 싹다 유배보낸다. 이 싸움으로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 타격을 입었는데 이 권력 공백기를 틈타 조정을 장악한 것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었다. [[1768년]](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1760년대 후반이면 [[청나라]]는 [[건륭제]] 치세 중반으로 역사상 국력이 최정점을 찍었던 시절이다. 혹여 [[칭제건원|칭제]](稱帝, 황제국가로 호칭)한 것이 들켰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은 호란 시즌3가 될 수도 있었다. 애초에 훗날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것도 대국인 [[청나라]]가 [[아편전쟁]], [[청일전쟁]]에서의 패전으로 국제적 위상이 저 밑,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在魯又曰: "頃日觀象監燕貿冊子及測候器、千里鏡與圖內入之後, 冊子半帙還下, 半帙不下, 鏡與圖、器, 各有用處而未下矣" 上曰: "所謂窺日影, 雖云有功於察見日食, 而直見日光本非美事。 蔡京視日不瞬, 知其爲小人, 今名之曰窺日, 則不逞之徒窺上之象也, 已命碎之, 冊與圖亦已洗草矣。" 諸臣皆贊歎。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우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영조|상]](上)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개기일식|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公效)가 있으나 곧바로 [[태양|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반역|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 >《[[영조실록]]》 61권, 영조 21년([[1745년]], 을축) [[음력|음]] [[5월 12일]]자 기사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재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단, 파기한 것은 천체 관측용 망원경이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지상 관측용 망원경은 군사용으로 사용을 계속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1770년(영조 46년, 경인) [[음력|음]][[4월 5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태양]]의 흑점을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에 대해 관상감 관원에게 물어보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저 사건에 대해 《승정원일기》에서는 망원경의 성능이 좋지 못해서 부쉈다는 말도 함께 나와 규일경을 부순게 천체 관측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 한 일인지 아니면 성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일인지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영조 본인 스스로가 즉위 49년, 80세 때 본인의 치적을 정리한 '어제문업(御製問業)'이라는 시가 전한다. 이 시에 따르면 본인이 생각한 여섯 가지 치적은 다음과 같다. * [[탕평책]]을 시행 * [[균역법]]을 실시 * [[청계천]] 준설 * 여자 종의 공역 폐지 * [[서얼]] 등용 등 차별 완화 * [[속대전]]의 편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八旬事業 若問於予 80살 동안의 사업을 만약 내게 묻는다면 心窃靦然 其何以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一則蕩平 自恧二字 첫번째는 [[탕평책|탕평]]이지만, 스스로 그 두 글자가 부끄럽다.[* 영조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자 했던 사업이기도 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二則均役 效流緇徒 두번째는 [[균역법|균역]]으로, 승려에게까지 그 효과가 미쳤다. 三則濬川 可垂萬歲 세번째는 준[[청계천|천]]으로, 만세동안 (공이) 드리우리라. 四則復古 婢類皆閑 네번째는 복고[* 옛 제도를 회복함]로, 여종들이 모두 한가롭도다. 五則叙衆 子光後初 다섯째는 [[서얼|서]]중[* 서얼들을 중용함]으로, [[유자광]] 이후 처음이다. 六則昨政 卽大典法 여섯째는 작정[* 예전의 법]으로, 바로 [[속대전|대전]]의 법이다. }}} > ---- >'''어제문업 전문''' 한편 영조는 즉위 51년 쯤인 [[1775년]](영조 51년)경에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자 세손인 [[정조(조선)|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했으나 정조의 반대파인 [[홍인한]]이 반대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 이때 [[국왕|상]](上)의 연세가 이미 대질(大耋)에 올라 몸에 병이 해마다 더 많아지니[* [[박시백]]은 영조가 정국의 안정을 생각했다면 적어도 세손의 나이 스물에는 전위(傳位)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어야 했다며 "다 늙어서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권력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며 깠다. ~~영조: 니들도 [[권력]] 한 번 잡아봐라 그게 얼마나 놓기 힘든데~~] 조용히 조섭을 하는 중에 늘 군국(軍國)의 여러 가지 일들로 근심하였다. 이해 [[10월 7일]]에 연화문(延和門)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담후(痰候)가 매우 심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일을 아뢰지 못하고, 임금은 곧 대궐로 돌아와서 [[정조(조선)|왕세손]]에게 하교하기를, > "지난 여름 너에게 [[명례궁]](明禮宮)의 일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궁부(宮府)와 다를 것이 없다. 근래의 대소 사전(祀典)에 꼭 너를 시켜 대신 섭행(攝行, 섭정)하게 한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나의 근력(勤力)을 시험하여 보려고 하나, 스스로 버틸 방도가 전연(前然) 없다. [[정조(조선)|어린 세손]]이 숙성(熟成)하여 나를 지성(智誠)으로 섬기니, 결단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기무(機務)를 대신 듣게 한다면 내 생전에 친히 볼 수 있을 터이니, 어찌 빛나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 하니, [[정조(조선)|왕세손]]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경희궁 회상전#s-4.1|집경당]]에서 입시(入視, 임종을 들어가 지켜 봄)하였는데, 상(上)이 이르기를, > "근래 나의 [[신기#s-3]](神氣)가 더욱 피로(疲怒)하여 한 가지의 공사(公事)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국사(國事)를 생각하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 [[정조(조선)|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묘|종]][[사직|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나의 [[경종(조선)|황형(皇兄)]]께서는 ‘세제(世弟)가 가한가? 좌우의 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下敎)를 내리셨는데, 오늘의 시기는 더욱 [[경종(조선)|황형(皇兄)]]의 시기보다 더할 뿐만이 아니다. 두 자[* 대개 전선(傳禪) 2자를 가리킨다.]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정조(조선)|세손]]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까 두렵다. [[대리청정|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조선왕조|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卿)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 '''"[[정조(조선)|동궁]](東宮)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 하였다. [[영조|상]](上)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 "경(卿)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시(入視)를 명하고, [[영조|상]](上)이 이르기를, > "나의 [[균역법|사]][[탕평책|업]](事業)을 장차 나의 [[정조(조선)|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 이 병이 바로 영조가 할머니 [[명성왕후]]에서 기인한 다혈질적인 [[화병]]인 산증(酸症) 증세이다.]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작게는 담(膽)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卿)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과인의 [[정조(조선)|손자]]로 하여금 나의 심법(心法)을 알게 하겠다. 이 다음부터 [[정조(조선)|동궁]](東宮)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다만 나의 사업(事業)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 하였다. >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인은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법까지 전하여 주었으니, 대순(大舜)이 전한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훈계가 이것이다. 다만 이 두 편의 어제(御製)는 곧 우리 [[태조(조선)|성조]](聖祖)께서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을 모훈(謨訓)으로 삼는 글을 내놓아 우리 '''[[영조|성상]](聖上)'''에게 넘겨 주었으니, 부탁의 친절함과 주고 받음의 광명(光明)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아! 성상(聖上)께서 수고로움을 쉬시고 조용히 조섭을 하시는 때를 당하여 [[종묘|종]][[사직|사]](宗社)가 의지할 것이나 신민(臣民)이 바라는 바가 오직 우리 [[정조(조선)|왕세손]]뿐인데, 국사나 조정(朝政)을 우리 세손께서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하겠는가? 또 더군다나 실패한 [[사도세자|아버지]]의 대를 이은 적자로서 떳떳한 직분인 [[대리청정|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은 열성(列聖)의 고사(故事)에 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국사(國事)에 몸담은 대신이 있다면, 본디 명령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 저 [[홍인한|적신]]은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영조)의 간곡하신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내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희(沮戱)하여 그 말이 비할데 없이 아주 극도로 패악(稗惡)하여 신하의 례(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영조|성상]](聖上)께서 부탁하고 수수(授受)하신 고심(苦心)과 대계(大計)로 하여금 [[달포]](한달이 좀 지나는 시간)가 지나도록 시간을 끌게 해서 막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앞뒤로 선동(煽動)한 죄를 살펴보면 우선 그 죄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곧 이 하나의 연주(筵奏)를 가지고 보더라도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역적]]의 죄안(罪案)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진(朝診) 때에 [[홍인한|홍씨]]가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說]’로써 [[국왕|상]](上)에게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혜경궁 홍씨|혜경궁(惠慶宮)]]께서 이 말을 듣고 작은 종이에 써서, 반드시 수고를 덜고자 하는 [[영조|성상]](聖上)의 뜻이라고 자세하고도 간곡한 하교(下敎)를 [[홍인한]]에게 통지하였으나, 그가 석연(夕筵)에 이르기까지도 주대(奏對)한 것은 조진(朝診) 때와 같았다. 아! 만일 [[홍인한]]이 과연 [[영조|성상]](聖上)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진(朝診) 때에 대답한 것은 그래도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당황한 마음을 미봉하려고 하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혜경궁 홍씨|혜경궁]]의 글을 본 뒤에 입시(入視)하여 주대(奏對)한 것도 또다시 전과 같았으니, 조진 때엔 비록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 말이 똑 같았다면 그에게 과연 딴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홍인한]] 일당이 이 일에 대하여 발명(發明)하려고 하였으나 참으로 수고를 덜고 싶어하는 [[영조|성상]](聖上)의 뜻임을 몰랐다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내어놓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한 이것은, 그날의 글로써 알린 뒤에도 오히려 다시 사실(事實)과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먹은 마음의 자취(自取)가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그들이 생사(生死)를 같이하는 [[노론|당]](黨)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더라도 그 사이에 딴 뜻이 없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 ---- > [[http://sillok.history.go.kr/id/kua_15111020_001|《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1775년]]) 11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이들은 영조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정조(조선)|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승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가 오히려 [[정조(조선)|세손]]을 지원 사격하고 [[홍국영]], 서명선, 정민시 등의 [[정조(조선)|정조]]의 측근들이 [[홍인한]]을 탄핵했다. 영조는 이를 받아들여 정조에게 임명권과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을 직접 넘겨주었고 [[정조(조선)|정조]]는 무사히 [[대리청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정조는 [[사도세자|죄인]]의 아들[* 逆敵之子 不爲君王 / '''역적지자 불위군왕''',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이었어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탈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달 후인 [[1776년]](영조 52년) [[음력|음]][[3월 5일]] 묘시(아침 6시경) 영조는 [[경희궁 집희당|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사망하기 전 피가 섞인 가래침과 구토를 자주했다는 증상으로 보아 일종의 [[폐렴]]으로 인한 사망인 듯 하다. 영조 사후 [[정조(조선)|정조]]의 [[조선/왕사|왕위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정후겸]], [[홍인한]]은 즉위 이후 처형당했고, [[김관주]]는 [[순조]] 때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우의정에 올라 [[신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려다 실패해 [[함경도]] [[북청군|북청]]으로 유배가다가 사망했다. [[홍봉한]]은 [[정조(조선)|정조]] 등극과 함께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덕에 실각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했다. 잠시 [[풍산 홍씨]] [[세도 정치]]를 기획, 획책한 [[홍국영]] 역시 [[정조(조선)|정조]]에게 숙청당하며 척신 정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나 싶던 찰나에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신 안동 김씨]] 세도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른다.[* 다만 영조는 다른 왕들에 비해 [[조선/왕사|정통성]]이 취약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재위한지 30년이나 되는데도 역모가 일어났으니 더욱 권력에 대한 집착이 커질만도 했다.][* 다만 정조에게도 김조순에게도 다소 억울할것이 김조순까지는 정말 무난하게 능력있는 신하 였지만 김조순이 물러난뒤 효명세자가 단명하고 뒤이어 헌종까지 급사하면서 왕권은 흔들리는데 신하들을 제어할 수단이 없어진 상황에서 세도정치가 극심해진 부분은 감안해야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