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조/인물 (문단 편집) ==== 정성왕후 ====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도 좋지 않았다.[* 영조도 최악의 남편이지만, 영조보다 더 최악의 남편은 '''아버지 [[숙종(조선)|숙종]]이다'''][* 그런데 숙종 당시의 정황, 시각, 해석 등에 따르면 오히려 '''숙종과 동급이거나 영조가 더 최악이다.''' 일단 '''숙종은 정비 [[인경왕후]]와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3년상은 못치렀지만 그것도 사실 치르려 한것을 모후인 [[명성왕후]]의 압력으로 인해 못치른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빽으로 들어온 계비가 바로 [[인현왕후]]이다. 당연히 정이 없는게 너무나도 당연했고, 정비의 3년상도 치르기 전에 들어온 왕비라 일찌감치 폐위까지 할법한것을 어머니이자 왕대비 [[명성왕후]], 법적 증조모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 두 왕실어른의 눈치를 봐서 어쩔 수 없이 폐위만 못시킨 것이고, 실제로 그를 보여주듯이 장렬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1년만에 폐위시켰다.[* 물론 반발은 거셌다. 아무리 비정상적으로 들어온 계비라지만 어쨌든 들어오고나서 투기를 어느정도 넘어갈수 있는 정도로 한거 이외에 문제점이 없었던데다 이미 시어머니이자 왕대비인 명성왕후의 3년상을 치르고, 폐위 당시에도 법적 시증조모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국상을 치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이쪽은 5년후 갑술환국을 기점으로 복위시키면서 비위도 맞춰주고, 복위후에 왕비 대우도 분명 제대로 해주었다. 그런데 '''영조는 별 잘못도 없이 멀쩡히 들어온 조강지처를 말실수 내지 친척의 잘못 하나를 꼬투리 삼아 33년이나 홀대하였다.''' 이정도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할때 보인 막장행동들과 동급이거나 어찌보면 더 악질인 셈이다.] 정실인 왕비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부부]] 금슬이 매우 나빠서 안 좋을 것을 넘었다.''' 영조와 정성왕후 부부의 사이가 최악인 건 적어도 [[궁궐]] 내에서는 공공연했고,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정성왕후를 제대로 대우해주고 따른건 아들인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적모로서 사도세자를 영조의 학대로부터 보호하고 그를 잘 대해주었기에 사도세자 역시 정성왕후에게 의지하며 사이가 좋았다.]와 그의 친모인 후궁 [[영빈 이씨]]였다.[* 영조는 정성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영빈 이씨는 매우 총애했다.] [[야사(역사)|야사]]에는 [[결혼]] 첫날 밤에 정성왕후가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첫날 밤 영조가 "손이 참 곱습니다."며 감탄했는데 무심코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 이게 그렇게나 소박맞을 일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녀의 이 발언을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숙빈 최씨는 [[궁녀]]인지 [[무수리]]인지 현대까지 [[논란]]이 분분할 정도로 출신이 불분명하며,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외모]]와는 달리 손마디도 굵고 손이 참 거칠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연잉군(당시)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 그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서덕수는 [[경종(조선)|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1명이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 말을 세상에 알린게 영조이므로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서덕수 덕분에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정성왕후는 죽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증 가지고 엄살부린다"며 씹어버렸고 그녀의 병세와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대전 [[내시]]에게 대신 보고하여 영조가 진찰 내용을 간접적으로 보고받을 정도였다. 영조는 심지어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 때도 찾아오지도 않으며 [[파토]]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게 한이 맺혀 시름시름 앓다가 [[단명]]했을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로는 정성왕후도 나름 장수했는데 '''1757년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만 65세였다.'''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요즘 기준으로도 단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724년에 [[왕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바꿔 말하면 그 오랜 세월을 비정한 남편한테 철저하게 무시당하면서 살았고 [[최후]]까지도 남편이 박대했으니 더욱 [[불행]]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위의 손 일화는 야사에 불과하지만 정성왕후와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아내의 장례는 내팽개치고 사위의 문상을 먼저 갔다는 걸 보면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영조 본인은 느릿느릿 와서는 사도세자더러 "네 [[옷]]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명색에 일국의 국모이자 조강지처의 죽음은 본체만체 하고 일개 서녀에 불과한 옹주의 남편을 우선시하는 행태에, 신하들과 대간들까지 경악하며 행차를 결사 반대했지만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며 강행했다.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서울특별시|한양]]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조선)|정조]]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눈치]]를 본 탓이다.[* 다만 정순왕후의 눈치를 본 이유는 정조가 정순왕후를 두려워해서 그런게 아니라 죽기 직전에 정순왕후를 찾을 정도로 그녀와 친밀해서 그랬을 것이다.][* 나중에 [[문정왕후]]도 [[중종(조선)|중종]]이 [[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는 모양.] 영조는 오히려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려고 빈 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 봉분은 중앙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왼쪽의 빈 공간이 바로 영조가 묻힐 예정이던 자리.]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거기는 원래 [[효종(조선)|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파묘 자리였다.[*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 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 더군다나 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는데 정작 영조 본인이 [[정조(조선)|자신이 총애한 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