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조/인물 (문단 편집) == 성품 == 이와 같이 학구적인 면과는 다르게 성격은 매우 옹졸하며 급하고 감정에 기복이 심했으며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 눈물을 무기로 삼기도 했다. 숙종, 경종과 관련된 곳만 갔다 하면 숙종과 경종이 그립다고 울었으니 수신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건 매우 좋은 [[프로파간다]]였다.] 입도 더러워 실록에는 영조의 말을 '''[[검열삭제|차마 들어담아 적지 못할 말씀]]'''이라고 쓴 일이 여러번 나온다. 그러니까 육두문자 욕을 조정 중신들 앞에서 대놓고 갈겼단 것이다. 특히 영조의 손자였던 정조 또한 욕을 달고 사는 매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성격은 영조의 형인 경종이나 아버지인 숙종,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영조의 할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 그러나 영조의 무서운 면은 이와 같이 격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에는 끝간데 없을 만큼 냉정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조 시대의 정치사 전반에서 잘 드러나는 편인데, 특히 [[사도세자]]를 죽여버릴 당시에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고, [[사도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며 후속 조치를 내리는 모습은 대단히 치밀하고 신중한 모습이다. 참고로 [[야사(역사)|야사]]인 [[연려실기술]]에 등장하는 [[피휘]] 사건을 보면 상당히 대인배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영조의 이름에 들어가는 밝을 금(昑)은 백성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만약 임금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백성들이 피휘를 하느라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개명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영조는 40여년 동안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물론 어찌어찌 이름이 알려졌는지, 어느 날 승지가 영조 앞에서 상소문을 읽던 중 금(昑)자를 발견하고 머뭇거리자, 괜찮다고 허가한 후, [[피휘]] 적용 범위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http://m.khan.co.kr/view.html?artid=201310081114281&code=960201|참고 기사]] 다만 근거가 야사이고 애초에 개명하는 방법이 있는데 피휘 적용 범위를 논하는 것을 보면, 실화는 아닐 가능성이 있다. 당장 후술할 인간성 항목만 봐도 영조가 이런 대인배적 행실을 보였다고 보기는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