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종(남송) (문단 편집) === 가족관계와 후사문제 === 영종은 [[공숙황후 한씨]](恭淑皇后 韓氏), [[공성인열황후 양씨]](恭聖仁烈皇后 楊氏) 외에도 3명의 후궁을 두었고 아들이 9명이나 있었지만 모두 2살도 못 돼서 요절해버렸다. 더구나 당시에는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광종의 자손이 자신 외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의 아들 [[조덕소]]의 10세손 조순(趙詢)[* [[본명]]은 조여원(趙与愿)]을 뽑아 [[양자(가족)|양자]]로 삼고 황태자로 삼았으나, 조순마저 요절하는 바람에[* 시호는 경헌태자] 태조의 아들 조덕방의 9세손인 조횡[* 본명은 조귀화(趙貴和)]을 뽑아 새로 양자로 삼았다. 조횡은 원래 광종의 손자 위(魏)왕 조병[* 광종의 차남 조개의 외아들로 후사없이 요절했다.]의 양자였으므로 영종은 조카뻘인 조횡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조횡은 양모였던 공성인열황후 양씨와 사미원을 늘 비방했고, 이 사실을 알던 재상 [[사미원]]도 이런 조횡의 행동을 싫어하였기에 서로 불화하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후 사미원을 필두로 한 조정은 노쇠해진 영종에게 조횡을 폐할 것을 건의했지만 영종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영종이 병석이 있을때, 사미원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이 공성인열황후 양씨를 설득해 기왕 조병의 양자이자 태조의 11대손 조귀성(조여거)을 다시 양자로 뽑아 이름을 조윤으로 고치고 태자로 삼게 했다. 조윤은 영종이 승하하자 곧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이종(송)|이종]]이다. 한편 조횡은 이종 즉위 직후 제왕에 진봉되었다가 사미원에 의해 자진을 강요당한다. 영종은 1224년 죽은 뒤 영무릉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