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종(북송) (문단 편집) === 즉위 전까지의 삶 === [[송인종]]의 사촌 형제인 복왕 [[조윤양]](趙允讓)의 13번째 아들로 송 인종의 5촌 조카에 해당한다. 초명은 종실(宗實)이었으나, 즉위 후 서(曙)로 개명했다.[* 종실(宗實)이라는 [[이름]]에 쓰이는 한자가 둘 다 생활 속에서 많이 쓰이는 한자이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서 개명한 것이다.] 어린 시절 인종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어 제왕 교육을 받았지만, 1039년 인종의 친아들이 태어나면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인종의 아들이 일찍 죽은 뒤에도 궁 밖에서 살다가 1063년 인종이 붕어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때 자신이 읽던 책들 외에는 궁으로 가져온 게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사실 인종의 5촌 조카이자 양자였지만 즉위하는 과정에서 재상 문언박과 부필, [[한기(북송)|한기]]의 도움이 컸다. 문언박과 한기가 그를 지지해준 것은 일찍이 조종실(영종)이 인종의 양자가 되었고, 어려서부터 황자로서 갖춰야할 교육을 받은 그의 자질과 능력이 괜찮았던 까닭이 컸다. 또 나이도 다른 종실 남자 중 성년에 접어들었다는 점, 조종실이 평소 재상인 문언박과 부필, 한기를 비롯한 신하들을 존중해왔고 이미 조정 내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만들어뒀다는 점도 그가 영종의 즉위를 지지한 이유였다. 과거 정헌태후 유씨(유아)의 수렴청정을 경험한 인종은 황후 조씨가 평소 유아를 많이 본받으려고 해왔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여러 중신들이 건저 문제를 제기할때마다 늘 “짐도 다 생각이 있소이다.”라고 말할 뿐 자신과 황후가 일찍이 궁으로 데리고 와서 기른 양자 조종실(조서)을 확정적으로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황자 조서(조종실)를 후계로 삼아도 ‘조황후의 조카가 조서의 부인이었기에 황후가 반대할 이유가 없고 , 이미 조서가 재상인 문언박과 부필, 한기 등의 지지를 받았기에 신하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또 정국 주도권 역시 조서가 신하들의 지지를 받고 나이도 있기에 조황후에게 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종법 문제상의 번거로움 등도 있었기에 인종은 신하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말만 안 할 뿐 여러모로 뒤를 잇기에 무리가 없는 조서에게 사실상 뒤를 잇게 할 생각으로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문중의 소종이 대종의 뒤를 잇는건 무척 번거로운 문제였기에 인종은 자신의 양자인 조서에게 ‘종실’이라는 명칭을 붙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조서는 한사코 이를 거절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겸손하게 사양해 인종을 흡족하게 만들었고 이후 신하들에게도 사군으로 인정받게 되어 인망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고, 조황후와 중신들은 인종이 죽고 다음날 황자 조서를 인종의 후계자로 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