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창대군 (문단 편집) ==== 어린 대군의 입지 ==== 이런 와중에 소북 영의정 [[유영경]]은 부화뇌동하여 노골적으로 세자 교체에 열을 올렸고 [[인목왕후]]는 궁중 법도를 어겨가며 아들 이의를 세자처럼 입히고 다니는 상황이였다. 다만 전술했듯 [[광해군]]의 지지기반이 훨씬 탄탄했기에, [[인목왕후]]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후일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인목왕후는 본인에게 힘이 있었고,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했던 [[인조]]대에도 형편 없는 처세를 했었다.] 거기에 [[선조(조선)|선조]]는 이의의 외가이자 인목왕후의 친정을 키워주기 시작하는데, 일례로 [[김제남]]이 아들 김규(金珪)를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인 정신옹주(貞愼翁主)의 장녀와 결혼시키려 했던 건이 있다. 정신옹주의 남편인 서경주(徐景霌)는 훗날 왕이 될 광해군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이 혼사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뜸 선조가 서경주에게 편지를 보내 김제남과 사돈을 맺을 것을 요청하고,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서경주는 결국 자기 딸과 김규를 결혼시킨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13년 5월 17일 기사] 원래 부마의 집안은 조선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들이지만, 처가를 키워주려는 선조의 이러한 행보가 광해군을 더욱 불안하게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인지 훗날 민인백의 《태천집》에는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서경주가 사돈 [[김제남]]에게 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서경주는 이의가 창진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역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침을 놓아서 [[시각장애인|소경]]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으니, 그 방법을 이용하여 이의가 눈을 멀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김제남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고 한다. 만일 서경주의 말대로 영창대군이 눈이 멀었다면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았겠지만 비참한 죽음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서경주의 아버지 서성(徐渻)은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유배된다. 서성은 [[선조(조선)|선조]]의 고명 대신 가운데 가장 폐모 반대에 적극적이었고, 그래서 가장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은 뒤집힌다. 서경주는 [[이괄의 난]] 때 호종한 공로로 숭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금화내자제조(禁火內資提調)를 겸하였으며, 1631년(인조 9년) 아버지가 죽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만년에 다시 상방원(尙方院) 및 관상감(觀象監) 제조와 총관(摠管)을 겸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전란을 피해 인조 21년 64세로 죽을 때까지 혼란의 시기에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 여담으로 [[김제남]]의 아들 김규는 [[칠서의 옥]] 때 역적이 되어 화를 보았다.] ~~인조 때 죽었을지도.~~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장님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의 분위기는 일촉즉발 같았고, 여기에 선조는 의도야 어찌됐든 불을 넘어서 [[네이팜]]을 들고 와 도배를 하는 꼴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