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창대군 (문단 편집) ==== 광해군과의 나이 차이 ====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나이차는 자그마치 31년. 어머니 [[인목왕후]]조차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고, 영창대군에게는 조카가 되는, 광해군의 아들 원손 [[폐세자 이지|이지]]도 영창대군보다 8살이나 많았다. 설사 광해군의 입지가 취약했다 쳐도 2살짜리 유아가 어머니보다도 나이 많은 이복형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명나라]]도 당시 [[만력제]]가 억지로 아무 문제 없는 적장자를 대신해 3남을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 "쟁국본" 때문에 [[지곤조기|"지금은 곤란하다"]]라고 반대한 거지, 광해군의 능력과 차기 왕위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강제로 폐하고 세자인 광해군을 세울 생각까지도 했던 명국이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만력제]]가 광해군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때 만력제는 광해군을 "조선의 세자"라고 표기하였다. [[명나라]] 황제와 명 조정이 세자 첩지와는 상관없이 사실상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한 것이다.] 그저 쟁국본 및 책봉 문제를 핑계로 조선을 길들여 이익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 승하 후엔 못이기는 척 광해군의 승계를 인정했다.[* [[명나라]]의 인정으로 논하자면 [[태조(조선)|태조]]도 명의 인정을 못받아 권지고려국사에 머물렀지만 자신의 왕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조선에 대한 명의 책봉은 어디까지나 사후 처리지 사전에 꼭 받아와야 하는 건 아니었고, 그걸로 후환이 생긴 사례는 없다. 광해군의 사례에서 유독 강조되는 건 어떻게든 왕 노롯을 계속하기 위해 선조가 핑계로 썼기 때문이다. 결론은 왕의 의지 문제.] 종합하면 광해군의 신료들의 지지, 실무 경험, 나이, 종법 등 모든 면에서 우월하여 그 기반이 결코 불안하지 않았고, 선조는 세자 교체할 힘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며 자기가 왕위에 계속 있기 위해서 견제 용도로 활용했을 뿐이다. 실제로 선조는 죽음이 가까워오자 전위의 명을 내렸으며, 이때마다 전위에 적극 찬성하는 [[정인홍]] 등 과잉 충성파는 제어하면서도, 세자가 석고대죄 할 때마다 "세자의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 했다. 유영경도 당연히 "전위는 안 되지만 세자의 지위는 흔들 수 없다"는 해명문을 올려야 했다.[* 물론 유영경이 전위에 반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영상으로서 왕이 "나 물러날 거임" 하는 상소에 의례적으로라도 반대해야 하는 게 신하로서의 도리였다. 문제는 유영경은 대놓고 영창대군을 빨아댄 것.] 그만큼 광해군의 승계는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유영경 등이 선조가 장수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 선조는 16살에 즉위해 총 40년 7개월을 용상에서 보냈다. 이는 조선 27왕 전체 4위이며 그때까진 1위였다. 이의가 선조의 즉위 때 나이와 같아지려면 재위 54년을 채워야 했는데, 이러려면 [[영조]]의 재위 기간을 뛰어넘게 된다. 선조는 [[인목왕후]]를 맞이했을 때 50세로 조선 왕 평균 수명을 넘겼고, 5년 사이에 [[정명공주]]와 왕자 이의를 낳았다.]에 바탕을 두고 세자를 교체하는 계획을 세웠을 정황은 높다. 그러나 [[유교]] 국가 조선에서 군신의 의리는 한 번 정해지면 뒤집을 수 없다는 명분을 뒤집기란 어려운 것이었고,[* 진짜 [[광해군]]이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 하다못해 이들의 반의 반이라도 되는 사고를 쳤다면야 폐출의 명분이 되지만, 광해군은 세자 시절 워낙 모범적이라 그런 건 없었다.] 유영경조차도 겉으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