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천·신녕전투 (문단 편집) === 전초전 #2 - 안강-기계 전투[* 다만 북한군이 경주로 침투하려는 걸 두고 싸워서 경주 전투로도 불린다.] (8.9 ~ 8.18) === [[파일:기계_북12사`ㅣ동sun.png]] 이 전투 당시 국군 및 북한군 12사단의 배치 및 이동로 - [[https://m.blog.naver.com/hmjin80/220769933215|출처]] 8월 9일 국군 제1유격대대는 영천으로 남진중인 북한군 12사단 1개 연대를 기습해 이들의 남진을 상당기간 지연시켰다.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국군 제1유격대대는 포항 봉화봉 일대에서 공방전을 이어갔다. 8월 11일 육본직할 17연대가 남진중인 북한군 12사단의 경로를 예측하고 기계~포항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서 북한군 12사단의 불안감을 키웠다. 8월 12일 국군 제1유격대대는 논골 방향으로 남진중인 북한군 차량들을 공격해 야포2문, 차량 12대를 파괴했으며, 이 와중에 북한군 12사단은 기계 남쪽 구련봉과 인접한 445고지의 국군 25연대를 몰아내 기계의 안전을 도모했다. 8월 13일 도로를 따라 어찌어찌 기계까지 파고드는데 성공한[* 그런데 이 당시 도로 양쪽 산속에선 북한군과 국군들이 교전을 이어가고 있었고, (위 항목에서 상술했듯) 북한군이 딱히 유리한 상황도 아니라 국군이 이들이 내려온 도로를 차단하고 포위할 위험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 당시 북한군은 김일성의 독촉을 받고 있었으며, 개전 초기에도 나름 유효했던 전략이고, 무엇보다 후속부대가 계속 밀고 내려오면 경주~포항~부산으로의 돌파구 형성도 가능했기에 이런 판단을 내린 듯 보인다.] 북한군 12사단은 445고지를 되찾으려는 육본직할 17연대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 1연대와 교전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1개 대대를 보현산으로 보내 그곳의 국군 유격대를 정리하려 했고, 이에 유격대원들은 428고지로 밀려났다. 이에 국군에서도 기갑연대와 18연대를 보현산으로 투입했고, [[안동·의성전투]]에서 지연전을 펼치고 남하중인 국군 8사단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래서 국군에선 8사단에게 보현산을 일임했고, 이에 좌측엔 21연대를, 우측엔 10연대, 16연대를 예비로 하고 제1,2유격대대들은 보현산 기슭에 배치해 영천으로 침투하는 적을 격퇴하게끔 배치했다. 8월 14일 국군 수도사단 18연대는 무명고지에서 농성중인 북한군 12사단 수비대에 이어 계속 남진중인 나머지 병력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압했다. 8월 15일 국군 8사단의 후방인 기계까지 깊숙히 침투 후 서쪽 운주산의 18연대와 접전중인[* 이들은 17연대와 18연대에 각각 공격을 가해 [[전투지경선]]을 파악한 뒤 이를 따라 1개 소대를 운주산 정상부까지 침투시켰지만, 그곳에 있던 연대본부 경계병들이 이를 발견한 뒤 장교들과 위생병, 통신병, 헌병 같은 비전투 병력들과 함께 교전을 벌여 격퇴시켰다.[[http://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695277|#]]] 북한군 12사단 주력을 괴멸시키기 위해 수도사단 18연대, 육본직할 17연대로 구성된 섬멸대가 결성(?)되었고, 18연대 1대대가 먼저 적 차량 10대를 파괴했고, 2대대는 한티제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동쪽 3사단 전선에선 [[포항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8월 16일 육본직할 17연대가 오후 4시 445고지를 점령했고, 수도사단 18연대도 용기동 고지를 점령해 북한 12사단의 측방을 위협했다. 8월 17일 새벽 수도사단 18연대 2대대가 기계 북쪽 288고지의 북한군들을 몰아냈지만 상당수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1대대도 고지 동북쪽의 253고지를 점령했다. 이렇게 기계 남쪽에 이어 북쪽 고지군을 모두 잃은 북한군 12사단은 슬슬 비학산과 운주산으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국군은 이를 완전히 박멸하고자 1,2유격대대들과 8사단 10연대를 추가로 투입하기로 한다. 8월 18일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한 북한군 12사단이 비학산과 운주산으로 뿔뿔히 흩어진 틈을 타 육본직할 17연대와 수도사단 18연대가 기계 탈환에 성공했고, 8사단 10연대는 구지동으로 진출했다. 8월 19일 안강-기계의 급한 불이 꺼지자 국군 8사단 10연대는 1사단에 배속돼 [[다부동 전투|다부동 방어전]]에 투입되기 위해 떠났고, 대신 제1유격대대가 8사단에 배속되었다. 8월 20일 대구에서 [[제7보병사단|7사단]]이 재창설돼 3, 5, 8연대가 7사단에 예속되었다. 한편 수도사단 측에서는 8연대가 빠져나간 빈 자리에 기갑연대가 예속됐다. 8월 24일 8사단에 배속됐던 제1유격대대가 대구역에서 독자적으로 모병을 실시, 화물열차를 타고 밀양으로 내려가 대대 재편에 들어간다.[* 이후 이 유격대대는 9월 14일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된다.] 8월 26일 비학산에서 766부대 잔존병들을 규합해 군세를 늘린 북한 12사단 병력들이 야간에 기계를 점령했다. 뒤이어 [[경주시|경주]] 진출을 위해 운제산까지 점령했고, 이에 국군도 18연대와 26연대, 17연대를 차례대로 투입해 정리함으로서 이들의 발악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무렵 다부동에서 동쪽으로 이동중인 북한군 15사단이 12사단이 그랬듯 자양~영천 쪽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함으로서 전황은 새 국면을 맞이했다. 8월 29일 북한군 15사단이 국군 8사단 16연대가 지키던 포항 봉화봉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한 이 당시 [[포항]]지구로 침투하려던 북한군 8사단은 [[안동·의성전투]]에서 1개 대대급 손실을 입고 비교적 저항이 적을 것이라 판단되는 신녕으로 인접 사단들과 합동 진출해 구멍을 만들고 대구를 우회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제7보병사단|7사단]] 5연대와 수도사단 기갑연대를 배속받은 [[제6보병사단|국군 6사단]]이 [[군위군]] 산성면에 있는 조림산 일대에서 신녕~화산~영천으로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