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평군(1828) (문단 편집) === 철종 시기 === 그러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복형제|이복동생]] [[철종(조선)|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다시 [[한성부]]로 돌아왔고 영평군(永平君)으로 봉해졌다.[* [[봉호|봉호]]는 [[경기도]] [[포천시|포천]] 북부 지역에 있었던 [[영평군|영평군(永平郡)]]에서 유래했다. 대략적으로 현재 포천시 영북면, 영중면, 일동면, 이동면, 창수면에 해당한다.][* 여담으로 이 일대에 [[전계대원군]]의 묘가 있다. [[철종(조선)|철종]]이 이를 고려하여 봉호를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 때 영평군이 즉위하지 못한 이유는 [[질병|만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큰형 [[회평군]]이 죽은 뒤라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가계를 이어야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럴 때는 친자식이라도 [[서자]]가 잇지않고 [[양자(가족)|양자]]를 [[적자]]로 [[입양]]해 잇는다. 대명률에는 적자와 서자가 모두 없을 때 양자를 들인다고 나와있어서 조선 초기엔 이를 따랐는데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점점 서자가 있음에도 적자가 없다는 이유로 양자를 들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정조(조선)|정조]] 때에 잠시 설치했다가 사라진 숙위소가 부활하면서 그 [[대장]] 직에 임명받았다. 이후 능령[* 陵令. 왕릉을 지키는 벼슬 중 하나] [[벼슬]]을 받았다. 또한 [[고종(대한제국)|고종]] 때까지 [[국상]] 때마다 [[종친]]이 맡는 직책인 종척집사(宗戚執事)로서 활동했다. 1857년(철종 8년)에 본부인 [[평산 신씨]]가 사망한 뒤 곧 [[청도 김씨]] 김재협의 딸과 [[재혼]]했다.[* 영평군보다 훨씬 오래 살아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