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평군(1828) (문단 편집) == 사후 == 1900년([[광무]] 4년) [[음력]] 3월부터 만성 [[당뇨|소갈증]] 증세가 심해지다가 1902년(광무 6년) 2월 1일[* [[음력]] 신축년 12월 23일.]에 별세했다. 향년 74세. 〈[[제국신문]]〉에 따르면, 같은해 3월 6일에 발인했다고 한다. [[무덤|묘소]]는 원래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 산 11번지 [[전계대원군]] 묘역 내에 있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후손들이 [[화장(장례)|화장]]하여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https://ko.wikipedia.org/wiki/영평군_(1828년)|#]] 조선 후기 학자 이계양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 ]]《영평군만(永平君挽)》이 전해진다. >花萼高樓問幾時 (화악고루문기시) >화악루 높다는 것이 언제인가 > >叡陵松柏已生枝 (예릉송백이생지) >예릉의 소나무와 잣나무에는 이미 가지가 돋았네 > >靑茅早列周封爵 (청모조열주봉작) >일찍이 임금의 반열이니 주나라에서 봉한 작인데 > >赤舃巍參洛社耆 (적석외참낙사기) >붉은 신으로 낙사기영회에 우뚝 참여했도다 > >雨散滄江龍寂寂 (우산창강용적적) >창강에 용도 쓸쓸하게 비가 흩뿌려지는데 > >雲歸華表鶴遲遲 (운귀화표학지지) >화표주의 학도 느리게 느리게 구름을 돌아가도다 > >天胡不借期頤壽 (천호불차기이수) >하늘이 어찌 백세 장수를 빌려주지 않았다해도 > >光武昇平共樂之 (광무승평공락지) >태평한 [[광무]]년을 함께 즐겼도다 >---- > 이계양 著, 《계양유고》 중에서[[https://cafe.daum.net/honamhakgwan/i7Xx/12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