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니체리 (문단 편집) == 몰락 == 나중에 결혼이 허가되고 무슬림도 지원이 가능하게 바뀌며 예니체리 지위가 세습되는 등 여러 가지 변화를 거쳤는데, 그 결과 예니체리들은 강력한 군사집단에서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이익집단으로 변모해 버렸다. 심지어 상공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거의 [[마피아]]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예니체리들이 이권을 지키기 위해 단체행동을 하거나 반발하는 것은 그전부터 있었던 일이었으나, "세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특히 1637년에 비(非) [[무슬림]] 백성 중에서 소년들을 차출하여 엘리트 병사로 훈련시키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예니체리는 세습과 지원으로 충원되기 시작해 세습화가 더욱 심해진다. 나중에는 그 결과 전투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1621년 [[호틴]]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맞설 때 12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졸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필 상대가 키르홀롬의 영웅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얀 카롤 호드키에비치]]였다는 것과 총사령관 [[오스만 2세]]가 너무 어려서 성급했다는 것도 한몫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예니체리가 쓸 만했던 것도 아니다. 이러한 예니체리들의 추태를 보고 열받은 오스만 2세는 예니체리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하극상|예니체리들은 선수를 쳐서 오스만 2세를 살해해 버렸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오스만 2세의 삼촌인 무스타파 1세를 복위시켰다. 이후 예니체리들은 [[술탄]]도 무시하는 군사력과 제국의 내정까지 주무르는 정치력을 가진 강력한 집단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자랑이자 술탄의 적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던 존재'''에서 '''술탄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로 변질되었다. 1622년과 1631년에는 아예 낮은 임금에 불만을 품은 예니체리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들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반란 자체는 [[쉴레이만 1세]] 때부터 일어났었는데, 16세기 후반 이후 서유럽발 가격혁명으로 인해 오스만의 경제가 악화되어 화폐가 평가절하되면서 예니체리 뿐 아니라 관료들도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동요하기 시작한다. 봉급의 액수 자체는 변화가 없지만 봉급으로 받는 은화에 불순물이 대량으로 섞이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봉급이 삭감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니체리들은 때로 이스탄불을 약탈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을 정도로 타락해 군인으로서의 신념도 완벽하게 잊어버렸다. 19세기 초에 보다못한 셀림 3세가 [[니자므 제디드|이들을 없애려 했지만]] 실패해서 오히려 폐위, 암살당했다. 셀림 3세의 사촌 동생인 [[마흐무트 2세]]가 즉위한후 18년을 기다려셔야 예니체리를 해체하게 된다. 당연히 예니체리들이 가만히 있진 않고 1826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식 군대가 교전에서 그들을 압도해 코스탄티니예 내 병영으로 몰아넣고 신식 대포 15문을 위시한 막강한 화력을 퍼부어 예니체리 상당수를 학살했다. 이 사건을 '상서로운 사건'이라 부른다. 그 후 2년여에 거친 잔당 토벌 끝에 살아남은 예니체리들 수천 명이 처형당했고, 일부는 유배되거나 신식 군대에 편입됐다. 예니체리의 라이벌이었던 [[시파히]]는 유혈사태 없이 순순히 해산되어 신식 군대로 편입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담으로 시파히들은 예니체리 해체 때도 상당히 활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