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역사 (문단 편집) === 로마의 직접통치 === 서기 70년에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유일하게 남은 부분이 [[통곡의 벽]].]과 도성(都城)을 철저하게 파괴한 로마군은 폐허로 변한 도성의 터에 제10군단의 기지를 조성하였다. 한편 도망친 잔당들은 [[마사다]]와 감라에서 결사항전을 꾀했지만, 결국 로마군의 공세로 함락을 앞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후, 5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가 순행 중 예루살렘 유허를 방문하고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로마식으로 재건하였다(서기 130년). 이 명칭은 7세기의 이슬람 정복 시까지 이어져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일리야 (إلياء)라고 불렀다.[* 다만 이슬람에서도 신성시되며 알 쿠두스 명칭이 이후에 정착하게 되었다.] 서기 131년,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하자 유대인들은 스스로 메시야라고 칭한 시몬 바르 코크바의 지휘 하에 재차 봉기하였다([[제3차 유대-로마 전쟁]], 132 ~ 135년). 하지만 봉기는 철저히 진압되었고 --빡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의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출입을 금하였다([[디아스포라]]). 파괴된 성전 터에는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 신전이 세워졌다. 서기 2세기 말 사마리아인들과 계속 갈등을 벌이던 유대인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지원하고 그가 황제가 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 조치가 완화되었다. [[파일:external/www.odnowa.eostroleka.pl/zeslanie_ducha.jpg]] [[파일:external/ohmygodtv.ca/7832348850_d29145a513_o1.jpg]] >Quia consuetudo praevaluit et antiqua tradtio ut Heliae episcopus honoretur, habeat honoris consequentiam, salva metropolitani propria dignitate. >예루살렘의 주교가 존경을 받는다는 관습과 옛 전승이 더 힘이 있기에, 따라서 예루살렘 주교는 수석 대주교에 고유한 품위를 유지한 채 명예를 계승한다. >---- >[[니케아 공의회]] 제7조[* Ignacio Ortiz de Urbina,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2 ''Les conciles de Nicée et de Constantinople 324 et 381''}}}, 황치헌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p.373] 313년의 [[밀라노 칙령]]과 395년의 테살로니카 칙령의 단계를 거치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예루살렘의 중요도가 급상승 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주교는 [[총대주교]]로 [[예루살렘 총대주교|승격되었다]]. 367년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이자 로마 제국의 기독교 약화와 이교 부흥을 꾀했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의 성전과 재단의 재건을 허락하였으나,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율리아누스의 유대교 성전 재건은 단순한 관용의 표시가 아니었다. 이는 기독교가 진정한 이스라엘을 계승했다는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다니엘과 예수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만을 로마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정하면서 유대인들은 더 심각한 곤경을 겪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황후이자 여성 철학자였던 [[아일리아 에우도키아]]가 438년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유대인을 차별하는 규정들을 완화했다. 에우도키아는 당시 시대의 주류이던 기독교 대신에 고대 그리스 종교를 믿고 고대 철학을 공부하면서 반지성주의적인 광신도들에게 종종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심정적으로 동정했던 듯 하다. 시리아의 수도사 바르소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에 대한 에우도키아의 관용 정책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