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역사 (문단 편집) === 아이유브 왕조 === >1187년 7월 4일, 살라흐 앗 딘은 프랑크 군대를 하틴의 뿔에서 제압하였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를 생포하였다. 그해 9월 20일, 무슬림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재차 포위되자 성 안의 기독교도들은 ([[1차 십자군]]이 자행하였던) 1099년의 대량 학살에 대한 복수의 칼이 두려워 몸서리쳤다. >수비를 책임지던 [[발리앙 드 이벨린]]은 바위의 돔을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며 공격군에 엄포를 놓았다. 이에 살라딘은 공성을 중단하고는 배상금을 받는 조건부 항복을 허락하였다. 라틴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몸값을 내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은 값을 치르지 못하여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기독교도 2천 명을 대가도 없이 석방하는 풀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살라딘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다. 그는 550년전 칼리파 우마르가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처럼 성묘 교회에 대한 어떠한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만 690년에 이슬람의 성전으로 세워진 바위의 돔 위에 있던 십자가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돔 위의) 십자가를 쳐 넘어뜨리자 프랑크인은 물론이요 무슬림까지 큰 울음을 터뜨렸다. 무슬림들은 '알라후 아크바르!!'라고 울부짖었고 프랑크인들은 심히 괴로워하며 울었다. 서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도 커 땅이 흔들리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유일신을 섬기는 두 종교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바위의 돔의 십자가 조형물이 내려진 이 작지만 큰 사건은 성스러운 도시의 주인이 다시 바뀌었음을 상징하는 작은 변화였고, 이슬람과 기독교 양측의 기록에 남아있다. 프랑크인들이 물러가면서 감소한 예루살렘의 인구를 메꾸기 위해 살라흐 앗 딘은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인]]들과 예멘, 모로코의 유대인들을 초청하여 예루살렘에 정착시켰다 한다. 오늘날의 스페인 남부에 해당하는 [[알 안달루스]] [[무르시아]] 출신의 이븐 아라비라는 수피 신비주의 철학자도 아이유브 왕조에 정착했다.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그는 수피즘과 가톨릭 교리를 접목시킨 새로운 사상으로 많은 추종자를 모았으며, [[메카]]에서 성지 순례를 하는 동안 [[성령]]과 직접 접견했다고 주장했으며, 1206년 예루살렘에 방문하면서 꿈 속에서 자신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예언자, 성인들과 같이 왕좌에 앉아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주장하는 후일담을 책에 담았다. 그의 주장은 이슬람 세계에서 커다란 논란이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논란 속에서 알 아라비의 사상을 추종하는 수피들이 메카보다도 더 선호하는 성지가 되었다. 13세기 들어, 5차 십자군을 지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아이유브 술탄인 [[알 카밀]]과 협상하여 예루살렘을 재차 십자군 영토로 복귀시켰다. 다만 수비대 설치는 금지되었으며, 시내의 이슬람교도 역시 안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 공존도 30여 년 만에 [[호라즘 왕조]]의 개입으로 깨졌고, 예루살렘은 아이유브 조를 멸한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