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송논쟁 (문단 편집) ==== 현종의 역할 ==== 어쨌든 예송논쟁의 주체는 서인, 남인, 막 즉위한 [[현종(조선)|현종]]이다. 점차 교조성을 나타내는 유교 종법과 예법에 관한 견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며, 같은 당 내부에서도 해석이 엇갈리고 다른 주장이 나오는 등 매우 큰 사건이었다. 동시에 왕은 이런 분열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치열한 파워 게임이었다. 특히 각종 개설서나 대중 역사서 등에는 현종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등한시되거나 아예 현종의 존재 자체가 무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현종을 빼놓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의 아들 숙종은 아버지를 모방해 환국 정치를 했고 마침내 왕권의 강화를 이룬다. 한편 현종 개인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논쟁이기도 했다. 부모 상중에 일어난 싸움이며, 지리한 예학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 자신의 정통성은 계속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한쪽의 손을 들 경우 광해군 때같이 자칫 [[역모]]가 일어날 위험이 컸다.[* 세습형 전제군주제에선 왕의 혈통에 대한 정통성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꼽히므로 이런 일이 날 수밖에 없긴 했다. --여기에 세조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해당 시기에 단종은 왕취급도 못 받는 [[노산군]]이었고, 단종의 후계는 끊어졌으니 이 시기 왕들에게 세조는 중흥의 군주였다.--] 산림 등 벼슬없는 유자들까지도 편이 갈려 싸우기 시작해 골치를 썩혔으며, 그 반면 대다수 백성들에겐 다른 세상 얘기일 뿐 민생이 더 시급했다.[* 왜냐하면 하필 현종 치세에 백성들의 삶을 최악으로 내달리게 만든 [[경신대기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근에 이어 전염병 창궐까지 있었기에(…) 백성들 입장에선 더더욱 예송논쟁이 와닿지 않았을듯싶다. 이런 험난한 상황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중요한 건 왕의 정통성이기보단 '''그냥 자기내들 잘 보살펴주는 군주'''이기도 하고. --[[측천무후]]도 잔인한 짓은 많이 저질렀지만 민생은 잘 살폈다고 플러스 점수 좀 얻지 않았던가--] 다만 현종과 관료들이 민생을 신경 안쓴건 아니고 실제 경신대기근이 시작되자 연례행사처럼 올라오던 예송관련 논의는 갑자기 실종된다. 애당초 경신대기근 당시에는 '''재상이나 왕실의 인척'''[* '''현종의 처백부'''였던 병조판서 [[김좌명]]이 경신대기근 와중인 1671년에 죽었고, 그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서필원]]도 얼마 안 가 목숨을 잃었다.] 마저 죽어나갔던 시기라서 왕가나 사대부도 예외 없이 생존의 문제가 더 시급했기에 예송이고 나발이고 신경쓸 틈도 없었다.~~아닌 말로 일단 살고 봐야 예송논쟁이고 뭐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