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예수회 (문단 편집) === 초창기 === 1534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등과 함께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창설했던 [[가톨릭]] 모임이 그 기원으로, 1540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분열이 일어나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과 교세가 활발하게 번져갔으며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등장으로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회는 이러한 가톨릭의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어찌보면 [[스페인]]이 종교개혁의 위기 속에 가톨릭을 잃지 않았던 건 이 예수회 운동 덕분이기도 하다. 루터와 칼뱅의 교리와 가톨릭의 허점을 노린 지적들이 파고들 틈을 막아버렸으니. 이냐시오는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어 치료하는 과정에서 깊은 신앙체험을 하고 가톨릭에 몰입하게 되었다. 군인의 엄격한 기풍에 걸맞게 회원들은 군대제도를 모방한 엄격한 규율을 중심으로 양성되었다. 이에 맞춰 예수회는 굳건한 결합력을 자랑했으며, 반 종교개혁 운동과 유럽 이외 지역의 선교에 앞장섰다. 이냐시오 본인을 비롯하여 2, 3대 총장 모두 [[스페인]] 출신이었고, 스페인 왕실의 비호를 적극적으로 받은 만큼 초기 예수회는 전투적이고 팽창적인 스페인 가톨릭 신앙의 영향력이 짙었다. 예수회는 초기부터 "교황이 원하시면 어디든지 간다."는 자체 최종서원의 모토 답게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선교에서 눈부신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했다.[[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은 물론 아시아와 아메리카 현지에서 현지인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와 의료 및 봉사를 위한 병원 등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며 지역 현실과 문화를 알고 거기에 적응하며 선교를 펼쳐 지역현실 파악에 더딘 유럽교회나 교황청과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예수회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 자체가, [[마르틴 루터]]가 불 지핀 [[종교개혁]]의 불길에 안일하게 대응한 [[교황청]]과는 달리 스페인이나 북이탈리아, 플랑드르 지방의 지역 교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가톨릭]]의 신앙적 혁신을 추구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회가 군대적 규율에 기반하여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수직적인 형태를 가졌다고 하나, 이는 수도회의 행동적 특징일 뿐이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비롯한 예수회 초기의 신앙적 지도자들은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이나 파리의 신비주의적 신앙관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양심을 중요시했다.''' 또한 [[미사]]뿐만 아니라 사적인 고행과 성찰, 명상을 통한 개인적인 신학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 등 르네상스의 신학적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교황청과의 노선 차이가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편이다.''' 애초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대표 저서이자, 예수회 양성 과정의 핵심이자 꽃인 "영신수련"에서도 이냐시오 본인은 "이러한 (신앙적 각성) 과정은 이를 체험하는 각 개인의 성격, 배경, 심성, 성향에 맞추어 적용 해야 한다"고 말했을 만큼 이성적이고, 지성에 기반한 믿음을 중시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