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회 (문단 편집) === 엘리트 교육 === [[이냐시오 데 로욜라]] 본인부터 귀족 가문의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적 엘리트였고, 예수회 내부에서도 교황청에서는 억압한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신학관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만큼 예수회는 교육 활동, 그것도 당대 유럽 귀족과 군주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여 짦은 세월에 지리적으로는 [[개신교]]가 장악한 [[독일]]이나 [[동유럽]]의 영토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이후 철저하게 반가톨릭 정서가 뿌리 박은 [[영국]]에서도 여러 귀족 가문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역 가톨릭 귀족들과 음모를 꾸며 반 왕실 음모 계획에 가담하는 등, 근세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공세를 막아내고 [[플랑드르]], [[보헤미아]], [[폴란드]] 등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영국에서는 예수회의 이미지가 그닥 좋지는 않다. 실제로 [[폴란드]]와 [[프랑스]]의 예수회는 당시 국왕들의 가정교사로 개신교 탄압을 부추겼고,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은 예수회 사제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위그노]]들이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로 쫓겨나면서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정을 가졌고 개신교가 우세한 [[북유럽]] 전체에 퍼져나가서 혐오감과 악명이 퍼졌다. 실제로 [[성공회|국교회]]로 갈아탄 [[잉글랜드]]와 그 잉글랜드의 지배 아래 있는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을 수복하기 위해 예수회 수사와 사제가 지속적으로 파견되었다. [[명예혁명]]의 원인이 된 [[찰스 2세]],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용인 정책 과정에서도 대륙에서 예수회 사제들이 많이 들어와서 영국국교회와 그보다 한층 더 반 가톨릭적인 청교도들에겐 공공의 적이었다. [[청교도 혁명]]과 왕정 복고 과정에서 [[청교도]]들이 다시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나서 [[미국]]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좋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러하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거나 질투를 한 역사가 있는데 일단 수도회 호칭을 '''[[예수]]'''회라 칭한 점으로 인해 다른 [[수도회]]에서 크게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창설자 이름을 본 딴 [[도미니코회]], [[베네딕토회]], [[프란치스코회]] 등과 달리 이냐시오회가 아닌 예수회로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내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야 할 이름이기에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 분([[예수]])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초창기 교황 [[바오로 3세]]가 창립에서부터 전례 없이 전폭 지지했으며, 무엇보다 내부에선 수직적 위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교황이외의 다른 권위는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회는 다른 가톨릭 조직 즉 [[교구]] [[주교]]나 세속 왕국과도 충돌했고 결국 18세기 일시적으로 해산되고 [[포르투갈]]과 [[프랑스]]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완전히 추방되기도 했다. 본고장인 [[스페인]]에서조차 배척받았는데, 예수회가 [[대항종교개혁]]의 선봉이었지만 정작 보수적인 스페인에서는 예수회가 지나치게 [[프로테스탄트]]적이며 지나치게 유대스럽다 또는 [[유대인]]에 온정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앞서 [[개신교]]들은 세속 가톨릭 왕국에 섬처럼 떠 있는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교육에 대해 상당한 투자를 했는데, 예수회 역시 교육 특히 엘리트 교육에 열성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