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팅 (문단 편집) === 국민정부의 초공작전에 맞서다 ===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가 이끄는 우한 정부는 공산당과의 결별을 결정했다. 이에 7월 19일 중국 공산당 및 공산주의 청년단은 우한 정부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으나 단번에 진압되었고 우한 정부는 7월 26일 각 기관의 중국 공산당 당원들을 해임하는 조치를취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자체 무장 조직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예팅은 1927년 8월 1일 [[저우언라이]], [[허룽]], [[주더]] 등과 함께 [[난창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일시적으로 성공해 난창을 장악할 수 있었으나 국민 정부가 곧바로 반격을 가해왔고, 8월 3일에 홍군은 난창에서 광둥성으로 남하했으나 그 과정에서 국민혁명군과 광둥군, 현지 주민들의 습격을 받으며 점차 지리멸렬해졌다. 홍군이 광둥성 다푸현의 산허바(三河壩)에 도착한 후, 저우언라이는 주력을 챠오산(潮汕) 지역으로 남하시키고 소련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이후 예팅은 주더와 함께 삼허바에 남아 적의 추격을 막았고 9월 23일부터 10월 2일까지 남하해 챠오산에 도착했다. 이후 챠오산 전투 과정에서 한때 챠오산 지역을 공략하는 듯 했으나 끝내 대패하고 말았고 홍군의 잔여 병력은 광저우로 퇴각했다. 이때 예팅은 중병에 걸린 저우언라이와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 1927년 12월 11일, 예팅은 홍콩에서 광저우로 돌아와 공농홍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광저우에서 즉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코민테른에서 파견온 독일인 공산주의자 하인츠 노이만(Heinz Neumann)으로부터 '패배주의자'라는 호된 질책을 받았다. 12월 12일, 국민혁명군과 현지 군대가 광저우를 공격하자, 장타이레이(張太雷)와 노이만은 반격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관음산으로 차를 타고 갔다. 그러던 중 민명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장타이레이가 총에 맞아 숨졌고 홍군은 이로 인해 지리멸렬해졌다. 이후 [[장파쿠이]]가 이끄는 군대와 격렬한 시가전을 벌인 홍군은 완패를 면치 못하고 도주했다. 예팅은 이때 일반복을 착용하고 홍콩으로 도주했다. 이후 예팅은 1928년 홍콩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 일본, 소련을 거쳐 중국에 귀환해 중국 공산당 제6차 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리리싼]]과 [[왕밍]]에게 패배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군대를 저버리고 홍콩으로 도피한 행적 때문에 [[군무이탈]]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에팅은 이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 공산당을 탈퇴한 뒤 독일로 망명했고, 거기서 독일 현지의 기사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때 에팅은 국민당 좌파세력의 일원인 [[덩옌다]], [[천여우런]], [[쑹칭링]] 등이 결성한 '제3당'에 합류했다. 1930년 봄, 저우언라이는 베를린으로 가서 예팅과 긴 대화를 나누며 혁명은 자기 자신을 고려해서는 안된다며 그에게 공산혁명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또한 독일에 체류하고 있던 랴오성즈(廖承志)도 예팅을 격려했다. 이후 예팅은 군사 문제를 집중 연구했으며 군사 공학과 군사화학을 연구했고 지뢰 제조 등의 기술을 배웠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에팅은 중국에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가을, 예팅은 마카오에 도착했으나 쉽사리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은거했다. 그러다가 1933년 11월, 예팅은 [[차이팅카이]], [[장광나이]] 등의 초청을 받고 푸저우로 가서 [[복건사변]] 이후 수립된 '중화중공 인민혁명정부'에 가담했고 중국 공산당 대표 장윈이(張雲逸)와 접촉했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곧바로 진압에 착수해 중화중공 인민혁명정부를 붕괴시켰고, 예팅은 1934년 마카오로 돌아가 [[리지선]]과 [[천밍수]] 등이 조직한 중국 전국혁명 연맹에 가해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장제스는 예팅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초청했지만 예팅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가 1936년 12월 [[서안 사건]]이 터진 후, 예팅은 장파쿠이의 초청을 받아 서안으로 가서 장제스가 사살될지라도 봉천군벌을 무력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허잉친]]에게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허잉친이 듣지 않자 별 소득 없이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