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옌시산 (문단 편집) === 산서로 복귀 === 1931년 8월 5일 옌시산은 [[스여우싼]]이 난동을 부리는 틈을 타서 [[장쉐량]]과 관동군의 도움으로 자신의 고향에 돌아왔다.[* 관동군이 옌시산을 귀국시킨 것은 장쉐량을 견제하기 위함이었고 이를 위해 비행기까지 제공했다.] 하지만 옌시산은 자신의 산시 복귀를 알리지 않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가 없어진 산시는 무주공산이 되었으며 정부 활동은 정지되었다. 옌시산의 부하들은 장제스에게 자신을 옌시산의 후임으로 삼아달라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옌시산은 자신이 없는 동안 성장을 맡은 [[쉬융창]]을 막후조종하여 다시 지배권을 확보했고 장제스 지지를 선언하였다. 화북과 산서를 지배하려 했던 장쉐량은 옌시산의 복귀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지배지역이 평진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장제스는 [[1차 양광사변]]에 대응하느라 옌시산의 복귀를 방해하지 않았다. 옌시산은 자신이 없는 동안 엉망이 된 산시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1932년 장제스와 타협하여 2월 29일, 타이위안 수정공서 주임에 취임함으로 다시 산시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지 못한 장제스의 난징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한 것을 구실로, 옌시산은 산시에서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국민당 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국민당 찌꺼기만 남김으로 다시 산시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옌시산의 이러한 행태에도 옌시산이 반공 활동과 더불어 장제스의 난징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조건으로 그를 여전히 공직에 남겨두었다. 어쨌거나 중원대전으로 인해 옌시산의 피해도 컸는데 영토 손실은 별로 없었으나 그간 그가 안정적으로 운영해오던 산시의 재정이 파탄난 것의 타격이 컸다. 이 피해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회복되지 않았고 그가 일본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1935년, [[화북분리공작]]에 한창이던 일본 제국은 옌시산을 끌어들이기 위해 타이위안으로 관동군 참모 이시모토, 주중 일본 대사관 무관 타카하시 등을 잇달아 파견해 그를 포섭하여 화북분리공작에 활용하려 했지만 옌시산은 일본의 뒤통수를 치고 재정부장 겸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에게 전보를 보내 일본의 시도에 대해 고해바치며 국민정부가 일본에 대해 더욱 경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타이위안을 방문한 일본 군관들이 갖고 있던 지도를 볼 때, 일본은 처음에는 다만 황하 이북을 일소 교전시의 보급기지로 이용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지금은 장강 이북 지구까지 확대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에 일본은 옌시산 포섭을 포기했다. 산서성의 대권을 장악한 후에 대대적인 철도 건설사업, 중공업 육성 사업을 벌여서 척박한 산서성을 상하이 급의 공업지대로 성장시켰으며 구미의 최신식 설비와 기술을 초빙하여 생산성을 높였다. 하지만 지나친 국산화 집착으로 인해 담배까지도 국산화하려다가 양담배에게 밀려서 손해를 보는 등 언제나 성공을 거두진 않았다. 여하튼 군벌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산서성 공업화 정책이 마무리 되기 전에 장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성과를 일본군의 공격으로 잃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