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옌시산 (문단 편집) === 30년대와 [[중일전쟁]] === 이후 옌시산은 산시 성에서 은행 조직 개편, 내전으로 위축된 산시의 상공업 활동 촉진, 난징 국민정부의 법폐 발행에 대한 대응을 하며 산시를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이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 바로 생산경제발전에 집중한 십년계획이었는데 덕분에 산시엔 중공업이 대거 육성되었고 이는 1935년 난징에서 장제스가 실행한 5개년 계획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옌시산은 산시로 숨어든 공산당 토벌에도 참가했으나 공산당 토벌이 장제스의 권위 확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서 그리 열성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하지만 [[초공작전]]과는 별개로 옌시산 역시 공산당에 대응해야 했는데, 여러 군벌과의 전쟁 및 중원대전의 결과로 산시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1928년에서 1930년에 걸친 자연재해와 경제대공황의 여파가 중국을 휩쓸면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위기를 틈타 홍군 25군과 섬북홍군이 산시에서 활동을 전개했고 이러한 공산당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옌시산은 1935년 9월 18일 자신의 명의로 난징의 행정원에 편지를 보내어 "섬서성과 산서성은 하천을 끼고 서로 마주보는 거리가 무려 2천여리에 걸쳐 있으며 지역이 광할하여 군대의 힘으로만 봉쇄하긴 어렵다. 겨울에 강이 결빙되면 공산비적이 어느 곳으로나 도강 가능하니 한 곳도 방심할 수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옌시산은 1935년 8월 29일부터 9월 11일까지 타이위안에서 방공회의를 개최하여 촌락에 방공을 선전하고 산시의 예산 사용을 개혁하는 방안을 논의했으며 난징 국민정부의 소작농, 자작농 보호와 토지소유 제한 움직임을 담은 토지법 제정의 움직임에 발맞춰 토지사유제를 폐지하고 토지촌공유제 실시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토지촌공유제에 따르면 산시성 정부가 모든 토지를 매입한 후 이를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단위에 맞춰 분배한다는 것으로 분배 가능 나이에 징병문제, 세금 문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연구한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토지촌공유제는 국민정부의 승인을 받아 1933년부터 시험적으로 일부 촌락에서 실행되었으나 부농과 지주의 험악한 반발을 샀고 옌시산이 1935년 9월 16일 토지공유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등의 시작으로 전면 시행되진 못했다. 1935년 11월 [[기동사변]]이 발발한 이후 화북의 군정대권을 정리하기 위해 [[펑위샹]]과 공동으로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동정항일]]에 맞서 마오쩌둥의 산시 침공을 분쇄하였고 1936년 [[시안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자를 맡아 장제스 석방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장쉐량]]이 옌시산에 대해 불신을 품게 되면서 별 도움은 못됐다. 2차 국공합작 설립 이후 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되자 홍군은 옌시산의 지휘를 받게 된다. 옌시산은 희생구국동맹회를 창설, 반일을 외쳤으며 이를 위해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하였고 [[저우언라이]]를 정치고문으로 삼았다. 마침내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옌시산은 2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산시 방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은 너무도 강력했고 일본군은 [[쑹저위안]], [[탕언보]], [[웨이리황]]의 부대를 잇달아 격파한 후 베이핑, 톈진을 모두 점령하고 국민혁명군의 반격을 무력화하여 황허 이북의 중국 영토를 모조리 함락시켰다. 이때 옌시산도 차하얼 성을 비롯해서 산시 바깥의 영토를 모조리 잃었다. 펑위샹이 수비하던 6전구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옌시산의 영지인 산시로 몰려들었다. 옌시산은 홍군과 연합하여 [[평형관 전투]]와 신커우전-타이위안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흥분한 일본군은 더욱 거세게 공격해왔고, 결국 1937년 11월 옌시산은 산시의 성도 타이위안을 내주고 린펀(临汾)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1월 15일, [[펑위샹]], [[리지선]], [[리쭝런]], [[청첸]], [[천사오콴]]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한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손실이 컸던 탓인지 옌시산은 일반적인 진지전 방식의 방어를 포기하고 군대를 게릴라전이 가능하도록 개혁하였다. 이후 옌시산의 군대는 공산군이 그동안 벌였던 게릴라전 방식과 비슷하게 발전했고, 1938년 이후에는 옌시산의 측근들도 그의 정권을 '게릴라 정권'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0년 제복을 입은 옌시산1.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0년 제복을 입은 옌시산2.jpg|width=100%]]}}} || ||<-2> 1940년, 제복을 입은 옌시산[* 일급상장 계급임을 알 수 있다. 소매 계급장의 동그라미가 두 개이면 일급상장(4성장군), 동그라미가 세 개이면 특급상장(5성장군)이다.] || 공산당과 연합한 항일은 계속되었지만, 공산당이 옌시산 휘하의 부대들을 습격해 섬멸하는 일이 잦아지자 옌시산은 정말로 열받았고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 미운 공산당도 잡을 겸 1940년부터 일본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옌시산은 적극적인 반공으로 돌변, 희생구국동맹회와 산서청년항적결사대를 습격해 몰살시키는 진시사변을 일으켜 공산당과 완전히 돌아섰다. 옌시산은 자신이 일본에 저항하지 않으며 공산당을 토벌하는 대가로 일본군의 산시 철군과 식량 및 철 지원을 요구했다. 일본군이 고압적으로 나오자 옌시산은 협상 결렬을 선언했는데 이때 협상대표로 파견된 일본 대표가 [[하나야 타다시]]였다.(...)[* 이 작자는 상관에마저 폭언을 서슴지 않는 막가파로 '''그 똥군기로 유명한 일본군 내에서도 이 또라이 휘하의 55사단 전원이 마음 속에 [[프래깅]]을 꿈꿀 정도'''로 또라이였다. 염석산이 거절하든가 말든가와는 상관없이 이딴 막가파를 보냈다는 것부터 일본의 미스.] 하지만 일본군의 태도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옌시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박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또한 일본군이 옌시산을 암살할 것이란 거짓 정보가 들어온 것도 옌시산의 협상 거부 선언에 한몫했다. 결국 1943년에 일본군은 옌시산과의 비공식적인 휴전에 동의했고 산시의 옌시산 영지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간첩을 잡아내자는 플랜카드가 걸렸다. 이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하자 옌시산은 전혀 주저 없이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고 수천명에 달하는 일본군 패잔병과 장교들을 흡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