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옌후이칭 (문단 편집) === 군벌혼전 시기 === 1920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이 몰락하자 1920년 출범한 [[진윈펑]] 내각에서 외교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1년 진윈펑이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퇴하자 [[쉬스창]] 총통의 지명으로 국무총리를 대행했다. 이후 [[량스이]] 내각이 출범하자 다시 외교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우페이푸의 위협으로 량스이가 톈진으로 도주함에 따라 내각 출범 28일만에 [[쉬스창]] 총통에 의해 국무총리 대행에 임명되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으로 [[직예군벌]]이 집권하자 직예군벌들은 2대 대총통이었던 [[리위안훙]]을 총통으로 추대하였는데 이때 옌후이칭은 중화민국 19대 국무총리에 정식으로 임명되어 법통중광 이후 첫 내각을 맡게 되었다. 옌후이칭은 남북통일과 재병을 위해 교육총장에 [[황옌페이]], 육군총장에 [[우페이푸]], 내무총장에 [[탄옌카이]]를 임며아혔으나 이들은 모두 취임을 거절하였고 아홉 총장 중 여섯명이 없는 무력한 내각이 되었다. 여기에 중의원 의장 [[우징롄]]이 내각인선에 불만을 표시하며 중의원의 내각 불신임을 천명했고 8월에 국회가 개회하자 총사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923년 [[차오쿤]]이 [[회선 사건]]을 통해 대총통에 취임하게 되면서 1924년 25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지만 10월에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킴에 따라 황푸에게 내각을 내주고 사퇴해야 했다. 1926년 3월, [[직봉풍전쟁]]이 발발하고 대고구 사건으로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붕괴되자 [[장쭤린]]은 [[진윈펑]]을 총리로 삼고자 했는데 오성연군 총사령관 [[쑨촨팡]]이 [[우페이푸]]를 옹호하며 4월 20일, 옌후이칭을 총리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5월 5일, 북양군벌의 원로 [[왕스전]]까지 개입하여 옌후이칭 총리 임명을 지지하자 장쭤린이 어쩔 수 없이 동의하여 옌후이칭에게 총리직을 제안했고 5월 12일, 옌후이칭이 총리직을 수락하여 5월 13일 친서방 내각이라 불리는 우페이푸 파벌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장쭤린이 옌후이칭을 핍박하자 옌후이칭은 1926년 6월 22일, 처음이자 마지막 내각회의를 개최하여 [[두시구이]]를 총리 대행으로 지명한 다음에 국무총리에서 사퇴했다. 여담이지만 1926년 시점은 [[돤치루이]]의 사퇴 이후 국가원수가 없어 정부수반인 국무총리가 국가원수를 대행하던 시기로 엄밀히 말하자면 옌후이칭은 이 시기 국가원수였다. 국무총리 사퇴 이후 잠시 공직에 몸을 담지 않고 공공사업에 매진하였으나 [[국민혁명]]으로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국민정부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자 국민정부에 합류, 능력있는 직업 외교관들을 적극적으로 국민정부에 진출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