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옐브루스 (문단 편집) === 역사성 ===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상 필멸자에게 불을 유출한 죄의 형별로 티탄 프로메테우스가 결박되었던 산이 역사적으로 옐브루스가 인지돼왔다. 고대 그리스에서 옐브루스의 명칭은 Strobilus로 명명되었고 이 때부터 구미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의 뿌리에 옐브루스가 등장했다고 판단할수 있다. 19세기 근대까지도 유럽최고봉은 전통적으로 [[알프스 산맥]]의 [[몽블랑]]으로 간주되었다. 유럽세계의 동남쪽 끝에 간신히 걸칠까 말까 하는 옐브루스와 달리 몽블랑은 유럽세계의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이미 유럽 최고봉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코카서스의 옐브루스가 이 인식에 도전한 건 1870년대에 지나지 않는 최근이다. 이는 세계패권국의 영국의 있다른 최고봉 등정경쟁으로 부각되었던 면이 있다. 이에 러시아에선 1829년 현지인 등산안내원 Killar Khashirov를 최초 등정자로 주장하고 있는 동시에 최초의 외국인 등정자로 영국-스위스 탐험대를 후속시키는 구도를 만들었다. 북봉의 최초등정자는 Douglas Freshfield, A. W. Moore, C. C. Tucker, 전원 영국인으로 이들의 등정은 1868년에 이루어졌다, 1874년, 영국-스위스 탐험대가 스위스의 Peter Knubel를 가이드삼아 영국인 F. Crauford Grove 지휘하 Frederick Gardner, Horace Walker가 서봉을 마저 정복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20세기 초, 1930년대 [[소련]]은 옐브루스 정복을 지속적으로 시도했으나 유의미한 기록은 없었다. 반면 2차 대전 중 독일은 만명의 산악여단을 옐브루스에 주둔시키는 동시에 정상등정을 달성했다고 일컬는다. 1942년 8월,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와중 캅카스 지역의 석유를 노리고 나치 독일 제49산악군단 제1, 제4산악사단이 침공한 이 일화는 무려 [[알베르트 슈페어]]의 진술로 확인된 것이다. 두 부대는 각각 병력을 차출하여 옐브루스 산에 올라 하켄크로이츠를 꽂았다. 명령한 사람은 산악부대장 루돌프 콘라트였던 듯하다. 그런데 이를 전해들은 히틀러는 명령하지도 않은 일을 하였다며 지휘관을 불러서 문책하였다. 히틀러가 이 중요한 시기에 왜 그런 한가한 일을 했냐고 질책하자 지휘관은 변명하기를 "총통 각하, [[조지 말로리|그것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히틀러는 "장군, 거기에 산이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아오. 하지만 거기에 소련군이 있소? 아니면 석유가 있소?"라고 되물었고 결국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독일 육군이 철수하고 이곳을 탈환한 소련 육군 역시 1943년에 병력을 동원해 등반, 산맥에 꽂혀 있던 하켄크로이츠 기를 전부 뽑아 버렸다.[[https://gall.dcinside.com/m/war/2737459|#]] 소련이 옐브루스 정상을 정복한건 1956년에 이루어졌다. 20세기 중반, 냉전 도중엔 소련 방문이 불가능해지고 공산권에 대한 서방세계의 반감이 깊어지면서 소련의 영토인 옐브루스는 사실상 유럽 최고봉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몽블랑에 자리를 내주다시피 했다. 그러다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 방문이 자유로워지면서 자연스레 유럽 최고봉의 상징성을 가진 산으로 복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