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삼국시대) (문단 편집) === 손오 정권의 경제사적 의의 === [[위진남북조시대|위진남북조]]의 사회 경제사 측면에서 본다면 오는 거의 위에 필적하는 비중으로 다뤄진다.[* 반면 촉이 차지한 익주, 지금의 [[쓰촨성|사천]] 지방은 한나라 때 이미 개발이 대부분 끝난 탓에 사회 경제사에서 촉한은 별로 안 다룬다. 이는 촉한이 고작 1개주만 가지고도 삼국 중 하나로 대충 대치가 가능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는 중국 경제사 측면에서 엄청나게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점을 오나라, 개중에서도 손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 이 시기 오는 이민족을 몰아내고 지금의 강동 지역인 남방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지역을 넓혔다. 당대의 오 지역은 아직 미개척지가 많아서 행정 구역을 쉽게 늘릴 수 있었다. 특히 건업을 수도로 정한 일은 반드시 다뤄질 정도로 중요시된다. 손권이 수도로 정하기 전까진 도시 근처에도 미개척지가 존재할 정도로 별볼일 없던 지역이 손권이 수도로 정하고 오나라 시기에 집중적으로 개발되면서 이후 오랫동안 강남 지역 정권들의 수도로 사용될 정도로 발전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위진 남북조 시대에서 건업을 수도로 한 남조를 가리키는 표현인 [[육조시대]]의 선두로 오나라가 꼽힌다. 전한 시기 아주 강성한 제후왕이자 [[오초칠국의 난]]의 주동자였던 오왕 유비의 영지였던 오나라의 부유함(<[[사기]]> 오왕 비 열전에 따르면 구리와 소금이 많아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을 생각하면 손권의 강남 개발 이전에도 강남은 개발이 많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전한 시기 오나라는 생각처럼 넓은 지역은 아니었다. 대략 장강 하류 삼각지와 그 주변 지역 정도에 불과한데 그것도 다른 왕들에 비하면 아주 크고 강성한 것이었다. 또, 양자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육조시대]] 이후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사람은 꾸준히 살고 있었고, 특히 남쪽은 고온다습하여 농사를 지어 작물을 키우기에는 오히려 북쪽보다 유리했다. 특히 하류지역인 양주 일대는 비옥한 삼각지가 엄청나게 넓게 자리잡고 있어 그 옛날 상고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읍락을 이뤘던 유적과 유물이 있을 만큼 역사 깊은 곳이다. 따라서 인구부양력은 중원에 비해 그다지 밀리지 않았으며 촘촘한 국경선을 서로 맞대고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리던 중원의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전란은 더욱 적어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의 춘추전국쟁패기를 보면 동원하는 군대의 양이 다른 나라의 몇 배는 될 때가 자주 나오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나타난 군벌들 중 상당수가 초나라 유민[* 후한시기 예주 패국 패현 사람이었던 [[한고제]]가 초나라 사람이었다.]들이었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인구수 하나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이는 오나라가 풍요로운 [[화이난|회남]] 지방을 손에 넣지 못하고 회수를 방어선으로 삼지 못한 탓도 있다. 실제로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부터 시작해서 [[동진]], [[유송]], [[남제]], [[양(육조)|양]], [[진(육조)|진]] 등 다른 육조 왕조와 달리 오나라는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회남을 차지하지 못한 왕조였다. 어쨌거나 대체적으로 손권의 오가 근거지로 삼았던 강남 지방은 오군 지역 일부를 비롯한 손권의 직할 지역 일부 외엔 한대에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손책과 손권이 여기서 지배력을 확충하던 후한 말에 북쪽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북쪽의 선진 농업 기술을 가지고 강남 지방의 황무지를 개발하여 장강 하류 지역은 점차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방으로 바뀌었다. 손권 정권은 토착 지주인 강동 오군(吳郡)의 [[오의 사성|고(顧), 장(張), 주(朱), 육(陸)]]씨와 강북에서 이주해 온 [[장소(삼국지)|장소]], [[주유(삼국지)|주유]], [[노숙(삼국지)|노숙]] 등 세족 집안의 지지를 받아 유지되었다. 때문에 손권은 사족 세력을 적극적으로 키워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직을 그들에게 맡겼다. 또, 일부 호적에 편입된 농민과 둔전객(屯田客)을 고급 관리들에게 하사하여 조세와 요역을 면제해 주는, 즉 복객제(復客制)를 실시하여 사족 지주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장군을 세습시켜, 장군은 정부에서 하사한 군대나 개인이 모집한 군대를 지휘하는 영병제(領兵制)를 실시했다. 그 결과, 사족에게 소속된 이들은 정부에 소속되지 않아 조세와 요역, 병역을 부담하지 않는 개인의 부곡(部曲)이 되었다. 이렇게 북방의 공격에 맞선 손오 정권의 표면적인 보호 하에서 중앙 정부의 정쟁에도 불구하고 호족들은 나름대로 독립적으로, 또한 경쟁적으로 개척과 확장을 진행하였다. >군사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장강 유역에서 좀만 아래로 내려가면 사회와 정치 제도는 중앙정부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둔 호족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역사는 이들에 대해 언급도 자주 안 하는 편이지만, 이 호족들의 네트워크가 오나라의 표면적인 후원 아래 식민화와 인구 증가를 이끌어 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손책과 손권은 처음에는 이 호족들을 대상으로 주도권을 지녔지만 나중에 가면 이들은 사병과 토지, 봉신을 통해 국가의 주류가 되었고 결국에는 조정을 지배하게 된다. > >(중략) > >일반적으로, 오나라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장강 남쪽의 땅은 더이상 중앙 정부의 이득을 위한 수탈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한나라 시절 장강 남쪽의 논, 광산, 교역 등으로 얻어진 부는 조정의 이득 혹은 북방경계를 위해 주기적으로 수거해가는 대상이었다. 황하에 위치한 정부에게 있어 남중국은 언제나 두 번째였고 가끔 조그만 반란이 일어나는 수탈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오나라 정부는 남쪽에 즉각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기존 수탈에 사용되던 한수와 회수는 습격로가 되었고 장강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금액은 합리적이었으며 이제 남부의 이득은 남부에 남게 되었다. 오나라 궁전과 병사를 유지하는 데 돈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남부 교역의 독점으로 충분히 매꿀 수 있었다. > >이러한 관점에서 조정과 수도가 모든 국가의 부를 독점할 필요는 없었고, 상당수의 병사들은 장강을 지키기 위해 배치됐으며 가끔 대규모 식민화에 동원될 뿐이었다. 그럴 때가 아니라면 각 지역의 발전은 지방 호족이 맡아서 했다. 그들을 지켜줄 군벌이 없긴 했으나 이는 주는 것은 거의 없이 수탈만 해갈 정부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으며, 또한 이민족들이 이 확장을 꾀하는 지방 호족들에게 미친듯이 시달린다는 얘기기도 했다. 이 호족들이 바로 남쪽을 개간하고 독립을 일군 자들인 것이다. >----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Rafe de Crespigny) 교수의 남부의 장군들(Generals of the South, 1990)[[http://rexhistoria.net/history_discuss/173814|출처]] 중에서. 오는 촉과 연합하여 위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하였고, 위와의 전쟁도 회하와 장강 이북에서 일어났다. 수군이 약한 위나 군사력이 부족한 오였기 때문에 쌍방은 반세기 동안 서로 대치할 수 있었다. 또, 오는 자연 조건이 다른 지역보다 좋아서 북쪽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기 때문에 농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마직업은 당시 수공업의 중심이었으며, 사직업도 점차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검(劍)이나 구리로 만든 거울의 공예 수준도 뛰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청자(靑瓷)의 제작 기술도 뛰어났다. 특히, 오는 동남 지방이 바다에 면해 있어 조선업이 발달하였는데, 건안군(建安郡)의 후관(侯官, 복건 민후)은 당시 조선의 중심지였다. 장강에 띄웠던 전선에 3천 명을, 바다를 왕래하는 큰 선박은 길이가 20여 장으로 6~7백 명을 승선시키고 화물 1만 곡(斛)을 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오는 조선업의 발달로 해상 교통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이주(夷州, 현재의 대만)에 보내 대륙과의 관계를 강화시켰고, 또 동남아시아에 있는 부남([[캄보디아]]), [[참파|임읍]](베트남 중부)에 사신을 파견하여 무역 왕래가 있었다. 외국 상인들, 심지어는 [[로마]] 상인들도 남해를 통하여 건업으로 와서 손권의 초대를 받고 무역하였다.[* 출처: 오의 정치와 사회 · 경제, 신승하 중국사, 2008.] 춘추전국시기 장강 유역인 형초, 오월 지역에 나라가 세워져 경제와 문화는 어느 정도 발전했으나 여전히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생산력은 낮은 상태였다. 그래도 적어도 생계를 꾸리는 데 큰 곤란은 없어 토지 개간에 큰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손오 시기에 북방의 선진 농업 기술이 강회 이남 지역에 전해지긴 했으나 아직은 이러한 혜택을 입은 지역은 넓디넓은 남방 지역의 일부일 뿐이며 그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낙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삼국 시대만 하더라도 손권의 직할지인 강회 이남 선진지역, 형초 일부 지역을 제외한 손오 강역 대부분의 지역 경지에 불을 질러 밭을 갈아 물을 끌어다 농사짓는 화전 경작 수준이었는데, 이 때문에 손오는 꾸준히 행정구역을 새로 개척하고 치소를 늘리고 [[산월]]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잡아 호적에 넣고 동화시킴으로써 개척을 실시하고 행정력을 강화해 나갔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손오의 개척으로 인해 오나라는 후한 말보다 2배 이상의 행정구역 확보를 이룰 수 있었다. 손권이 기존 농업의 발전에 아예 신경을 안 쓴 건 아니었고 열정적으로 농업발전을 시도해 본격적인 논농사가 오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단 농업이 발전되었으나 한정된 기존 영토가 아니라 새로운 영토의 개척과 인구, 행정의 확보였다. >226년 조비가 죽어 북방의 위협이 완화되자, 손권은 농업 발전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을 선포하고, 육손은 여기에 더해 장수들도 직접 개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권은 열정적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아들들도 직접 참여하겠다고 말한다. [[진서]] 식화지에서는 이를 보고 오는 이때부터 쌀농사에 전력을 다했다고 기록했으나 농업을 짓기 보다는 언제나 군사적 확장에 관심이 있던 손권에게 이런 평가는 과장인 것 같다. 몇 년 후 240년에 가뭄이 들자 손권은 징병과 부역이 농업을 방해한다며 장군들의 자제를 촉구한다. > >장강 남쪽과 북쪽은 서로 사정이 달랐는데 조조와 후손들이 다스리던 위나라는 한 번 정돈되었던 사회가 전란으로 혼란에 빠진 것이었기 때문에 둔전을 통해 부랑민을 정착시키고 새로운 행정체계를 만들어 군사 활동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고자 한 것이었다. > >하지만 장강의 개척지에서 손권은 이미 한족들이 자리 잡은 곳의 안전성을 올려서 얻을 게 별로 없었고, 어떻게 농지와 농민을 확보하냐가 문제였다. 그렇기에 주된 관심은 어떻게 더 공격적으로 나와 국경선 밖의 영토를 더 확보하냐였지 북쪽처럼 떠돌고 있는 이들을 자리잡게 하고 지키는데 있지 않았다. 물론 군사 활동을 위해서는 농업 기반이 필요했지만 농업 개선은 주된 관심이 아니었고 단순 계산으로도 손권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을 정복하고 식민하는게 이미 있는 농지를 개선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던 것이다. > >그렇기에 위나라는 제한된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오나라는 계속해서 확장을 했던 것이다. 오나라에는 경제 발전에 필요한 한나라의 복잡한 행정 정치 구조가 별 필요 없었고, 군과 현 체계를 자신에 맞게 변경해서 [[산월]]족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으며 필요할 경우 군사력을 동원했다. 이를 통해, 산월들은 새로운 현에 정착했고 시민으로 등록되었으며, 오나라는 이렇게 얻어낸 인력과 물자를 이용해서 더 확장하거나 아니면 북쪽의 외적을 막는데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나라에서 말하는 개발과 유지는 전쟁과 식민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 >하지만 이 확장 속도를 가늠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하제가 [[푸젠성]]의 해안가에서 시작해 [[민강]]유역을 장악한 것과 [[육손]]과 [[전종]]이 황산 남쪽에 있는 제하 유역을 장악한 얘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 양주 식민의 큰 틀은 234년에야 끝나는데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단양에 사는 산월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제갈각은 각 마을을 요새화하여 주민들을 밖에 못 나가게 하고, 병사들로는 마을 밖의 모든 곡식을 거두게 한다. 그러면서 투항하는 자에게는 규휼을 약속하니 기록상으로는 4만명이 나와서 항복했고 이 새로운 주민들은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길고 길었던 황산 지역 식민이 끝나, 장강과 제하 사이의 황산은 결국 중국에 속하게 된다. 이렇게 큰 틀은 끝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경지역 어딘가에서는 계속해서 이런 식민 활동이 때로는 정부에 의해, 때로는 개인에 의해 일어난다. > >오의 이런 개척을 평가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후한서]] 군국지에 실린 140년에 행해진 인구조사와 진서 지리지에 실린 280년에 행해진 인구조사를 비교하는 것이다. 다만 단순히 두 문서에 기록된 인구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데 후한서는 모든 인구를 셌지만 진서의 인구수는 오직 호(戶)로만 주어지고 그나마도 Bielenstein, "Census," 154-155에서도 언급했듯 세금을 내는 주민. 즉, 건장한 성인 남성만 센 숫자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의 목록은 확실한 편이기에 이 현의 위치와 숫자의 비교는 중국이 해당 지역을 얼마나 통제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 >이걸 보면 140년과 280년의 차이는 확연하게 들어난다. 같은 기간 동안 촉한의 현 개수는 117개에서 141개로 20% 정도 증가하는데 이는 남쪽에서 현이 더 늘긴 했지만 서쪽에서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오나라의 경우 장강 남쪽 현의 개수는 160개에서 322개로 2배로 뛰었으며 기존에 아무 것도 없던 곳인 오늘 날의 [[저장성]], [[장시성]], [[푸젠성]] 등에 현들이 속속들이 들어가있다. 특히 [[광저우]]에서 [[광둥성|서쪽 강을 따라 남쪽으로 가는 길과 베트남 쪽으로 향하는 해안가]]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기존의 변경 지역이었던 장강 유역은 이제 중앙 정부가 들어선 확고부동한 지역이 되었다. 다만 이 개척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것은 [[진(사마씨)|진나라]]로, 오나라가 개인적 필요로 의해 개척을 했지만 이후 진나라에 흡수되었고, 4세기 초반, 북쪽에서 밀려난 진나라가 과거 손권과 그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오나라에 망명정권을 세우면서 그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Rafe de Crespigny) 교수의 남부의 장군들(Generals of the South, 1990)[[http://rexhistoria.net/history_discuss/173792|출처]] 중에서. 이 오나라의 존재가 후에 남북조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만약 오나라가 장강 이남을 개발해 놓지 않았다면, 오랑캐의 침입으로 장강 이남에 쫓겨온 동진은 존립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북조시대의 남조는 거의 오나라를 계승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오나라 멸망 후 겨우 30년 만에 동진이 같은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동진은 오나라와 마찬가지로 건업(건강)을 그대로 도읍으로 삼았고, 오나라가 닦아놓은 기반으로 강남 개발을 계속한다. 다만 [[동진]] 문서에도 나오지만 화북에서 내려온 유이민 귀족들에 의해서 오나라 유민, 호족들은 차별을 받게 되고 그에 따른 반항심도 높았다. 경제 개발에 따른 환경의 변화도 있었는데 한나라 이래 진행되어 서진 말에 이르러 대규모로 인구가 이주했던 강남에서는 특기할만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본시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땅은 넓지만 인구는 희박했고, 죽목(竹木)이 우거진'([[사기(역사책)|사기]], 권 129) , 강북보다 큰 규모의 산림을 가졌던 강남에서 산림의 부족 현상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이러한 문제를 촉발했던 것은 후한 말~삼국시대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적벽, 이릉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화공, 장강과 한수, 회수 일대에서 발생한 수전에서 사용될 전함의 건조 등은 그 일대의 산림을 크게 훼손했다.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손오 정권[* [[손호]]가 2천석 이하 관리까지 직접 보내서 벌목을 감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과 그 이후의 남조 국가들은 목재 부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재의 조달과 소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산림의 부족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후한 말~삼국시대에도 목재 부족과 관련된 일화가 몇 차례 소개되는데, 손권은 건업에 궁궐을 건설하면서 무창에 있는 자신의 궁궐을 헐어서 목재를 충당했으며, 손휴 시대에는 광릉에 성을 보수하면서 그 지역의 무덤들을 도굴해 목재를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에도 현지 조달, 타지에서의 목재의 공급과 관련해 크게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