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삼국시대) (문단 편집) === 촉한과 비교할 때 === 사료상 오나라의 인구는 230만명으로 94만명에 불과했던 촉한보다 '''두 배'''나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 「군국지」의 주석에서 손성의 「진양추」를 인용하여 오나라의 남녀구가 230만 명이라고 했다. 이는 병사와 병사의 가족을 제외한 수치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촉한 멸망시 등애가 거둬들인 인구가 28만 호, 94만 명이라 한다. ] 삼국시대 특성상 호족에 예속되어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주민 수를 감안하면 실 인구 수는 이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력이었다.[* 물론 당시 기술과 행정의 한계로, 그 경제력을 다른 유형의 국력(군사력 등)으로 실현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또한 오나라는 남쪽의 교주를 중심으로 남방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는 여러 동남아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장강 이남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이에 반해 장강 하류는 춘추 전국시대부터 개발되었으며[* 춘추시대에는 [[오(춘추시대)|오(吳)]]와 [[월나라|월(越)]]의 영역이었고 전국시대에는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가 월나라를 멸망시키고 차지한다.], 오나라가 [[형주 공방전]]을 통해 장악한 형주 남부 지역(현재의 [[후난성]] 지역)까지 포함하면 촉한이 장악한 익주 전체를 상회하기 때문에 아무리 촉한이 국가 운영을 탄탄히 해도 근본적인 규모의 차이 때문에 오나라를 능가하기는 힘들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두 나라의 면적은 107만 km² vs 145만 km²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지만, 촉한에서 실제 활용된 국토는 파촉 지방의 거대한 분지와 한중, 기타 변두리의 땅 몇 조각 뿐이라 실질적으론 몇 배의 차이가 난다. 아무리 익주가 알토란 같은 땅이라고 해도 1개 주밖에 차지하지 못한 촉한과 4개 주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 오나라가 같을 순 없다. 현재도 촉나라 영역이었던 쓰촨+충칭+윈난 지역의 인구는 아무리 높여봐도 1억 5천만이 안되지만, 오나라 영역이었던 저장+장쑤+푸젠+광둥+후난+후베이의 인구는 총합 4억이 휠씬 넘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