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삼국시대) (문단 편집) == 군사 == [include(틀:역대 중국/대만의 군사조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79QQ3wVsAEf0cJ.jpg|width=100%]]}}} || || {{{#000000 손오의 병사. }}} || 군사적인 면에서는 [[세병제]]를 취했는데 군대가 [[사병]]화되어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는 점이 큰 약점이었다. 오나라의 장군들은 부자 형제 사이에서 휘하의 군대를 세습해 가는 것이 제도로서 인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나라 일대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나라가 정식으로 발족하기 이전 [[손책]]의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군대는 그것을 이끄는 장군의 사병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고 또한 각각의 군대가 독립성을 더해가게 되는 것이다. 즉 무력을 기초로 하는 오나라는 사병집단의 연합체라고 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연합시키는 핵심은 앞서 기술한 손권과 여러 장군 사이의 주종관계였던 것이다. 오왕 즉위를 기점으로 봉읍제가 폐지되지만, 호족들의 사병 연합군이라는 오군의 편제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다만 군량을 비롯한 보급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관장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제갈각과 고담 등 손권 친위세력이 맡았던 절도의 역할이다. 이는 호족 연합체인 오의 국가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족들 개인이 이끄는 군대를 모아서 오군으로 편성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군의 지휘 체계 아래에 또 별개의 지휘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방어전에서 꽤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반면, 외정을 나갔다 하면 발리는 게 일이었다. 특히 통합된 지휘 체계를 요구하는 야전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죽을 쑨 다른 원인은 남중 평정 후 말을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기병을 대신해 보병 전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던 촉한[* 유명한 [[팔진도]]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다.]과 달리, 오는 이런 노력이 없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 일본의 동양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런 손오의 체제를 일종의 일본의 개발 영주(사무라이와 다이묘의 전신격)와 유사한 체제로 보았다. 둔전제를 통해 노동력과 군사력이 일치되고, 휘하 병력의 규모가 장군의 영향력과 비례하게 되는 사병 연합군의 형태를 취하다 보니 장수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적극적인 싸움을 피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병사들이 평시에 농사에 종사하는 덕에, 정기적인 훈련을 거치던 촉한이나 위의 중앙군에 비해 그 정예도가 현격히 떨어졌다. 심지어 병사들이 다루는 제식 무기나 군의 편제조차 각 지휘관별로 다를 지경이었다고 하니까, 이래서야 체계적인 전쟁이 될 수가 없었다. 서진의 침공 당시 [[도준]] 등의 군대가 하룻밤 새에 홀라당 도망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오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경우로 보인다. 군사 지휘관들마저도 제멋대로이며 당시 기준으로 봐도 용맹함과는 별개로 규율은 형편없다고 볼 수 있을 정도. [[감녕]]과 [[여몽]]이 다툰 일화에서 이러한 군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감녕의 하인인 어린애가 여몽에게 도망쳐 있다가 감녕이 그 아이를 붙잡아 죽이자, 분노한 여몽은 '''[[내란|군사를 몰아 감녕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말리자 감녕과 화해하였다는 일화인데, 서로의 그릇을 드러내는 훈훈한 일화라고 포장은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한 국가를 대표하는 명장들이 무슨 [[조직폭력배]]들처럼 사소한 다툼으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가 원한을 품어 사병들을 함부로 동원해 전투를 벌이려다가 그만 둔 엽기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게 무슨 '막장'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미담'으로 취급된다. 이런 고위 간부들이 어린아이 하나 때문에 내전을 벌이며 서로 죽이려던 걸, '어머니의 중재로 참았다'고 자뭇 훈훈하게 기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갓 임관한 신입 무장들도 아닌 '''여몽과 감녕'''이 이런 짓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손권이 오왕에 즉위한 뒤에는 보급 체계라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손권이 오왕 즉위하기 전까지는 아예 봉읍제라 하여 각자 땅 나눠주고 '''[[봉건제도|적절히 관원 임명하고 각자 무기 조달해서 군대 편성하는 체제였다.]]''' 당시 촉한과 위의 대결은 아무래도 옹, 양주의 유동적인 상황을 촉한이 적극적으로 이용해 이민족, 현지인 포섭으로 계속 영향력을 늘리려 하고 위가 군사, 행정력을 동원해 이를 방어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선도 유동적이어서 서로 병력을 기동하는 일이 잦아 장수들이 활약을 주도할 수 있었다. 반면 손오와 위의 싸움에선 장강이라는 거대 지형의 문제로 서로 대치하는 국면이 주가 된 전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위가 공격하게 만들어 승리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육손의 [[석정 전투]]와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 실제로 강릉 근처의 방어 곤란한 평야지대에 둑을 쌓아 아예 침수시켜 버린다던가 강에 제방 쌓고 거기서 농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오나라의 굴욕으로 대표적인 게 [[장료#s-2.1|료래래(遼來來)]]로 유명한 [[합비 공방전|합비(허페이) 공방전]]이지만, 최대의 굴욕은 촉한 멸망 후에 익주나 먹자고 보협과 [[육항]]에게 병력 3만 명을 줘서 영안으로 쳐들어가게 했는데, 겨우 2천 명 이끌고 있는 [[나헌]]한테 쩔쩔 매다가[* '''[[관광|보협은 아예 출전한 나헌에게 발렸다.]]''' 이건 농성전 변명도 안 통한다. 육항은 먼저 나간 보협이 못 뚫고 빌빌거리니 추가 병력 끌고 지원 나간 것이다.] 진에서 보낸 형주 자사 호열에게 발린 것. 손오의 전쟁을 보면, 대체로 야전을 피하고 매복/기습이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적의 일정한 거점을 포위하는 공성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 역시 야전을 할 수 없는 오군의 특성 때문이다. 이것 역시 합비/소요진 전투 등에서 보이듯 장료 등의 숙장들이 지휘하는 정예병들의 강습에 손쉽게 당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조인을 격퇴하고 남군을 빼앗은 명장 주유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 주유조차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결국 주유 자신도 큰 부상을 입었다. [[육손]]이나 [[여몽]], [[제갈각]] 등의 장군들도 대부분 유인/매복/기습 등의 기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또 호족들의 연합이나 다름없는 정권이다 보니, [[손권]]은 권신들의 존재를 상당히 경계했다. [[주유(삼국지)|주유]]만 하더라도 [[손책]] 생전에는 양주 일대에서 손책과 주유를 일종의 공동 CEO로 볼 정도였고, 관위로만 보면 손권은 일개 군의 태수에 불과했다. 이런 취약한 기반에서 정권을 다져나가다 보니, 손권은 위나 촉한과는 달리 신하에게 일정 이상의 군권을 맡기는 일이 없거나, 맡기더라도 자신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군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234년 북벌 때만 해도 손권은 [[허페이]]에 10만 병력을 동원하면서 별동 부대에는 각 1만 명만 편성시켰다. 오의 군사 동원력이 그 정도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제갈각이 3년 만에 단양 1개 군에서 4만 명을 뽑아내고, 1만 명을 거느렸다는 증언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허페이 공격에 제갈각이 20만을 동원했다는 것도 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물론 대군을 모으는 것과 대군을 다루는 것은 문제가 다르지만). 문제는 후자의 경우인데 군을 맡기더라도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 손권의 신임이 기준이 되다 보니, 태상인 반준이 무릉만이 토벌을 지휘하고 [[제갈근]]이 대장군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람들은 자기 세력이 없이 연합군을 지휘하는 속된 말로 낙하산들이었는데, 제갈근의 소극적인 군지휘나 [[반준]]의 무릉만이 토벌이 장기간 이루어진 것은 이런 총사령관 인선의 문제가 아닌가 보인다. 한편 손오는 건국 과정에서 강남 토착민인 [[산월]](山越)의 저항을 받았다. 산월은 고대 [[백월]](百越)의 후예로 지금의 [[장쑤성]], [[안후이성]], [[푸젠성]], [[장시성]] 등지의 산악 지역에 분포했다. 이들은 농사뿐 아니라 무기 제조도 할 줄 알았으며 전투에 뛰어났다. 손오는 병력 충원과 재원 마련을 위해 산월이 비교적 많이 분포해 있던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했다. 제압한 산월인들 중 '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 자는 민호(民戶)로 편입'시키는 방침을 세워 전쟁과 생산에 활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