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오(삼국시대) (문단 편집) == 사회 == 한때 학계에서는 손오가 조위, 유촉과 비교하여 중앙의 통제력이 낮고, 지방 호족, 그중에서도 일종의 개발영주에 속하는 토호들의 힘이 강했다는 관점이 유행했다.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등 이 시대의 강남 정권들을 다룬 서적들에서는 오의 국가 구조가 이러한 개발 영주들과 피란민으로 구축된 측근 세력들 간의 균형으로 성립했다고 설명한다. [[오의 사성]]을 위시한 지방 호족들이 꾸준히 오나라의 주축이었으며, 이는 오나라가 건국된 시점부터는, 오의 사성 중 [[장온]]의 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3성('''육씨'''[* 오나라에서 원수, 재상 급만 '''3명'''(육손, 육항, 육개)을 배출한 사실상 황족인 손씨에 이은 2인자 집안이다.], 고씨, [[주환]]의 주씨)과, [[장소(삼국지)|장소]]의 일족인 장씨, [[제갈근]]의 일족인 제갈씨, [[전종]]의 일족인 전씨, 우번의 일족인 우씨, 주치의 일족인 주씨, 설종의 일족인 설씨, 보즐의 일족인 보씨, 여범의 일족인 여씨, 그리고 황족인 손씨가 아니면 아예 제대로 언급도 안 될 정도.[* 출처는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저작 '남부의 장군들' 중 [[http://rexhistoria.net/history_discuss/173814|오나라의 사회와 경제]] 챕터.] 다양한 가문의 인재가 넘쳐나는 위나라와 정복자 집단인 형주계가 인재를 독점한 촉과 비교해보면 호족들의 세력이 매우 막강했다. 3세기가 끝날 무렵, [[좌사]]는 오도부(吳都賦)를 지었는데 여기서 그는 오나라의 가장 잘난 가문 4개를 회계군에서 온 우씨, 위씨와 오군에서 온 육씨, 고씨로 뽑으며 이들이 모두 건업에 거대한 저택이 있고, 수많은 사병을 거느렸다고 적었다. 오국을 제외하면 아직 미개척지에 가까운 강남 일대를 기반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촉한이나 위가 그래도 과거 400년간 중원을 군림한 한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잘 구축된 군현제를 기반으로 하는 탈봉건적 중앙 집권 국가였던 반면에 [[한무제]] 시기에야 본격적으로 중국의 영역에 들어왔던 지역이 많았던 만큼 기반으로 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연립 정권인 오나라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앙의 힘이 약하고 지방 호족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엔 없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오나라 장수들 열전을 보면 커리어에 이민족 토벌이 기본으로 들어갈 정도로 이민족도 많았고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며 나라의 건국 후에도 행정 구역 정비와 호족들을 관리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손오의 성립은 손책의 강동 정벌에서부터 시작인데 한미한 가문인 손가[* 원래 해당 지역의 토호라고 봐주기 어려운 가문이다. 손이라는 성씨 자체가 공손씨처럼 과거 지배층의 후예임을 사칭하려는 사람들이 쓰는 성씨였다.]가 이 지역을 명분 없이 무력으로 장악한 데다가 지역 명사들과도 마찰이 심했기 때문에 건국 이후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손견, 손책 때부터 치면 80여년간 손씨 일가가 장기 집권하며 지역 군주로서 위상을 다진 덕분에 오나라는 삼국 중 유일하게 멸망 이후 오랜 기간 [[부흥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며 많은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여 나름대로의 권위를 세우는 데도 성공했다. 서진 시대 사서에서 몇 번 보이는 손오 부흥운동이나, (분명히 서진 시대에 쓰인 [[정사 삼국지]]에는 오서(吳書)에 본기(本紀)를 두지 않음으로써, 손오를 천자국으로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진을 계승한 남조 시대에는 손오의 천자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는 쪽으로 조정의 공식 입장이 바뀐 기록이 이를 반증한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23405|남조화]] [[박물지]]에 따르면 예장군에는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으며,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박물지의 저자 [[장화(삼국지)|장화]]는 오나라가 존속하던 시기의 동시대인이며 따라서 박물지가 쓰인 시기를 보자면 오나라 때도 이런 풍속이 있었을 것이다. >예장군豫章郡의 사대부들은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산다. 그런데 그 부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얼굴을 드러내고 시장에서 한 푼까지도 다투며 돈을 벌어 그 남편의 수레, 말, 옷 등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 남편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다시 부잣집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도, 여자들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바친다. 먼저 들어온 아내들이 비록 몇 년을 부지런히 하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 집안에 가득할 정도일지라도, 오히려 방출되어 자리를 뒷사람에게 피해 준다. 박물지 314(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