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군영 (문단 편집) == 개설 == [[조선]] 전기의 [[오위]]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후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최종적인 오군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군영 중에서도 실제 중앙군의 핵심은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었으며 이들 삼군문(三軍門)은 후일 [[서인]], 특히 [[노론]], [[세도정치]]기 정권유지에 병력 통제 및 재정 확보[* 어떻게 군대가 재정적 기반이 되는가 싶지만, 조선시대 군영들은 비용 충당을 목적으로 자체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령 훈련도감은 통화 주조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쉽게 말해 [[군비]] 착복을 통해 [[비자금]] 만들기 매우 딱 좋았다.]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머지 총융청·수어청은 수도 외곽의 방어를 전담하는 군영이었다.[* 총융청과 수어청은 [[경기도]] 일대 속오군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사실상 지방군화되었으며, 상시병력은 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 중 훈련도감은 5000명의 [[상비군]] 중심이었고, 어영청과 금위영은 속오군이 번갈아 가며 서울로 올라와 임무를 수행하는 번상군 중심. 총융청과 수어청은 속오군 중심이었다. 형식상 [[병조판서]]가 삼군문의 제조로서 오군영의 [[군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각 군영의 장과 [[병조판서]] 간에는 서열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영조 대의 병조판서 구선행은 수어사를 제외한 4군영의 장을 역임하였으며 병조판서가 된 뒤 금위대장으로 돌아간 사례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