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기(전국시대) (문단 편집) === 조작된 오기의 악행? === 하지만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초년기 오기의 악행이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위에서 언급된, 마을 친구 30명 싸그리 도륙내기, 어머니 장례 생무시, 고생과 행복을 함께한 아내의 목을 쳐버림... 등등의 냉혈하기 짝이 없는 일화가 모두 《[[사기(역사책)|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있는 '''[[카더라 통신|어떤 노나라 사람이 오기를 비방한 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에 들어서서 제기된 설이 아니라 20세기 중엽의 학자 곽말약(궈모뤄)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고, <술오기>(述吳起)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아예 '''오기의 악행이 봉건 귀족들에 의해 조작, 왜곡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한 바 있다. 《사기》 외의 다른 문헌에서는 '''이와 같은 일화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래에 서술된 오기가 재상 전문(田文)을 털려다가 역으로 털린 일화는 《사기》에만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한비자]]》(韓非子), 《여씨춘추》(呂氏春秋) 등 '''전국시대 당대'''의 문헌에서는 오기를 '''권세와 재물에 초연한 현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즉 오기의 악행이라고 기록된 일화들은 한나라 시대에 편찬된 사서인 《사기》 외에는 전국시대 당대의 문헌들과 [[교차검증]]이 안 된다는 얘기다. 특히 《[[한비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吳起之出愛妻, 文公之斬顚頡, 皆違其情者也。 >오기(吳起)가 사랑하던 아내를 쫓아내고 [[진문공|문공]](文公)이 전힐(顚頡)[* 진 문공의 19년 유랑길을 보좌한 10인의 신하 중 하나. 말이 좋아 유랑길이지 거지 생활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고생길이었다.]를 벤 일[* 진 문공은 유랑 시절 조(曹)나라의 희부기(僖負羈)라는 사람의 후대를 받은 적이 있어서, 나중에 조나라를 침공할 때에 희부기에게만은 크게 예우를 하고 상까지 내렸다. 그런데 이때 10인의 신하 중 위주(魏犨)와 전힐이 질투가 나서 고의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희부기의 집에 방화를 해서 희부기가 사망했다. 전힐은 방화하다가 멍청하게 실수로 자기도 타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진 문공의 지엄한 명에 의해 전투가 완전히 종료된 후에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한비자가 인용한 것은 후자인 듯.]은, 모두 그들 인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故能使人彈疽者, 必其忍痛者也。 >그러므로 남에게 등창[* 저(疽). 등에 나는 부스럼, 종기.]을 보이고 따게끔시키는 자는, 반드시 그 아픔을 견뎌 낼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이는 《한비자》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 달라 했는데 '국정 허리띠 치수'에 맞지 않아서 다시 짜 달라하고 외출했다. 아내는 "이미 날실을 넣고 짜서 고쳐 짤 수가 없습니다"하면서 그대로 짜 버리고는 내놓았다. 이 일 때문에 오기는 아내와 이혼했다. 쫓겨난 아내가 친인척 중 하나에게 자신 대신 용서를 빌어달라 부탁을 했는데, 이 양반이 말하기를 "오기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에게까지 이르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 마누라한테부터 그렇게 함으로써 법을 실천하겠다는 거니까." 또 다른 일화에서는,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달라했는데, 어쩐지 옛날에 짜줬던 허리띠보다 잘 만들어졌다. 왜 잘 만들었냐고 아내한테 따지니 이번엔 특히 정성을 들여서 짰다고 대답했다. 근데 오기 이 양반 왈: "난 저번 거랑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정성들여 잘 만들다니!" ~~아내: 아 어쩌라고 잘 짜줘도 난리야~~ 한비자가 인용한 일화에서 오기는 '''법치의 실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아내를 쫓아낸 철인''' 정도로 그려져 있다. 물론 한비자나 [[사마천]]이나 딱히 어느 쪽에 지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적어도 《사기》의 험담이 꼭 사실에 부합함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건 딱히 사마천이 악감정을 품어서 오기의 이미지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사기를 편찬할 무렵 오기에 대한 남은 기록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이를 취합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록간 모순이 생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사마천 역시도 기록하면서 "[[카더라]]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는 수준으로 적은 거라 나름 최선을 다하여 중립성을 지킨 거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오기와 피터지게 싸워 그를 진짜 원수로 여겼을 진나라 사람들이 쓴 《여씨춘추》에서도 오기는 이렇게 평가되고 있다. >숨은 낌새와 드러난 외양이 파악하기 쉽든 어렵든 [[성인#s-2.1]]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알아차릴 길이 없다. 알아차릴 길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은 "신기하다", "요행수다"라고 한다. 그러나 신기한 것도 요행수도 아니고, 그 이치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후성자와 오기는 '''성인에 가깝다.''' 다만 '''사람이 어느 한 면만 가진 것이 아닌 다면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는 점과, 제3자가 평가한다 해도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 본 모습만 가지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니까 사서에 기록된 오기의 모습이 딱히 미화나 폄하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실제 오기의 모습일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사마천이 법가를 싫어해 일부러 왜곡했다고 하나 사마천이 오기 사후 236년 후 인물이란 걸 생각해야 한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인물을 굳이 왜곡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당시 시점에서도 1500여년 전이라 기록이 거의 없었던 상나라의 왕계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 고증의 대가란 걸 생각하면 왜곡설은 초라해진다. 또한 사마천이 참고했을 수많은 사료 중 2000여년이 넘은 현재 여씨춘추, 전국책, 한비자 같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서적들 말고도 역사서에 이름도 안 남았을 전국시대의 기록을 감안해보면 왜곡설이야말로 기록을 선택취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참 한가지 말로 정의하기가 힘들고 선악의 구별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간도특설대]]라는 동아시아판 [[SS]]부대에서 중국인, 한국인 가리지 않고 애꿎은 민간인을 살육한 명백한 전범이지만 한국전쟁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전공을 세운 덕분에 평가가 참 힘든 [[백선엽]]이라는 인물이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기 당시 활약했던 정치가 [[로베스피에르]]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지시내렸고 자기 동지인 [[당통]]까지 단두대로 보내버린 냉혈한이었지만 동시에 부정축재 및 여자 문제가 전혀 없어 뭐 이런 인간이 있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더욱이 전혀 뜻밖의 위인이 오기 못지 않은 인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도조 히데키]]는 자기 조국을 전쟁의 수렁텅이로 몰아넣은 매국노이자 전범이었지만 막상 자기 부하들은 진심으로 사랑하여 매끼 반찬을 살펴보고 '''병사들이 자신과 똑같은 식단을 못 먹으면 자기도 정말 안 먹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자기 분수를 알고 안분지족했으면 후세에 욕을 안 먹고 좋게 살다 갔을 거란 동정심마저 든다. 현재 남아있는 《오기병법》 등의 사료에 있는 오기의 직설적인 면모를 들며 이런 사람이 어떻게 기회주의자나 위선자라고 할 수 있냐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시선이야말로 오기를 한가지 시선으로만 바라다 보는 편견일 뿐이다. 사람은 관계가 먼 사람일수록 경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친해지면 모를까 아첨부터 한다고 의외로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 사기사건 사례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사기치는 경우는 없고 인간적인 면을 보이며 피해자의 약점을 긁어준 다음 경계심이 풀어지면 그때부터 작업에 들어가서 사기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특히 왕을 비롯한 상류층일수록 이런 기회주의자나 사기꾼을 많이 접해볼 기회가 많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안목이 보통사람에 비해 탁월할 수밖에 없다. 타국에서 천거받아 온 사람인 오기 입장에선 자신의 실력부터 증명해야 앞날이 밝기 때문에 왕 앞에서도 직설적이면서도 사실에 기반한 발언으로 "나는 입만 산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당신에게 찍힐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이런 발언할 정도로 실력있고 믿음직한 사람이다"란 걸 어필했어야 했고 실제로도 실력을 증명했기에 출세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장 밑단락에 나오는, 병사들에 대한 처우에서 볼 수 있듯이 오기는 자신한테 필요하다 싶으면 주변의 평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위선적이라고 평가하겠지만, 그런 과거를 알 리 없는 병사들 입장에서 오기는 말 그대로 성인 그 자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오기를 성인같이 묘사한 진나라의 기록은 이런 병사들이 좋게 평가한 것을 적국에서도 이런 면모는 인정하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병사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사에게도 필요하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인간적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호의를 받은 사람 측에서는 좋게 평가하지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기록에 남아 있는 서로 상충하는 기록은 세월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오기 그 자신의 처신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