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기(전국시대) (문단 편집) === [[명장]]의 면모 === 오기는 [[진(통일왕조)|진(秦)나라]]의 동진을 막기 위한 요지인 서하(西河)로 부임해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했다. 서하는 위나라가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요충지였다는 점과, 문후가 승하했을 때 오기가 사흘을 통곡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문후가 오기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를 요충지로 보내어 그가 지닌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오기는 진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노려 침공을 개시하였고, 다섯 개의 성을 빼앗는 전공을 세웠다. 오기는 '''무졸(武卒)'''이라는 정예 중보병을 양성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무졸은 중무장을 하고 창과 방패, 칼, 무거운 쇠뇌, 쇠뇌살 50개, 3일치 식량 등을 [[완전군장]]한 채 100리를 행군하는 정예부대였다. 이들은 혹독한 훈련만큼이나 엄청난 혜택을 받았는데 논과 밭, 집은 물론이고 심지어 퇴직하면 연금까지 받았다. 덕분에 무졸의 병사가 되면 노예는 평민이 되고 평민은 부자가 된다고 할 정도였다.[* 때문에 순자는 무졸에 대한 엄청난 지출을 지적하며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렇게 오기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와 대치할 무렵 그가 세운 전적은 명실공히 불패였다. 덧붙이자면, 공을 세우지 못한 예비병들로 급조된 5만명의 부대로 50만의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 이것이 기원전 389년에 벌어진 후세에 음진(陰晉) 혹은 양진(陽晉)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전투이다. 서하에 말뚝박고, 이를 전진기지삼아 지속적으로 진나라를 압박하는 위나라를 축출하기 위해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킨 진군을 오기가 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군이 50,000명의 병력으로 10배의 병력을 물리쳤다는 구체적 숫자가 기록된 것은 《[[오자병법]]》인데, 과장이 섞여있긴 하겠지만 이후로 관서가 텅텅 비었다고 할 정도로 진나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빈사상태에 빠진다. 오기는 수십만이 동원된 큰 전투만 76회를 치른 결과 그중 64회를 승리로 이끌었고, 나머지 12회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다만, 이때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이 있기 전이라 다른 나라들이 벌벌 떠는 원톱 자리는 먹지 못했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389년, '''음진 전투'''로 진나라의 기둥 뿌리를 뽑았던 오기는 기원전 387년, 진나라 영내에 더 깊숙히 쳐들어가 승리했으나 이내 모함을 받고 초나라로 망명한다. 이후 기원전 386년, 진나라를 이어받은 진출공이 변란에 휘말리고, 진나라의 혼란기가 계속되었음을 감안하면 오기와 위나라 양측에게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오기가 진나라를 쳐발랐는데도 오기가 떠난 이후로 야금야금 서하 전역의 땅을 갉아먹히던 위나라는 결국 서쪽에 치우쳤던 수도인 안읍을 동쪽의 대량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서하 땅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안읍이 위치해 방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위나라는 기원전 342년 [[마릉 전투]]에서 결정타를 얻어맞아 완전히 몰락하고,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진나라는 서하뿐만 아니라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위나라의 서쪽 영토를 완전히 정복하고야 말았다. 그가 위나라에서 밀려난 이유는 왕실과 인척이 되기 위한 혼인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출세길에 오르고자 스스로 아내의 목을 친 그의 무자비한 면모나, 여자와 재물을 꺼리지 않았다는 악평이 자자했지만, 의외로 장수로서 군대를 통솔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병사가 등에 종기가 났다는 보고를 듣자 그 병사를 찾아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준 이야기가 바로 그의 다른 면모였다. 그런데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남편]]도 오기의 그런 행동에 감동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는데, 이젠 아들마저 오기를 위해 싸우다 전사하게 생겼다며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오기의 인간적인 면모를 두고 오기가 진심으로 휘하 병사들을 아꼈다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병사들을 만들기 위한 용인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일은 요즘 군대에서도 보기 힘든 일인데, 그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받은 감동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건 절대 빈말이 아니다. 오늘날의 군대에서 군 내부의 계급 차이 때문에라도 이런 일화는 있기 어려운 것인데, 당시에는 신분 차이도 있는데다 전반적으로 계급의식이 더 강하던 시절이니 더 말 할 필요가 없다.[* 가령 19세기 영국 해군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다이아몬드 섬]]에 배치되었던 장교인 울콤 [[중위]]가 부하 수병과 겸상을 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진급에 타격이 있는 견책이란 중징계를 맞고 더이상 영국 해군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사례도 있다.] 더하여 오기는 병졸들과 똑같이 입었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약 2,400여년 뒤 [[노먼 슈워츠코프]]는 [[대대장]]이 되자마자 [[장교]] 식당을 철폐하고 장교들도 사병 식당에서 먹게 해서 장병들의 신뢰를 얻었는데,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는 것은 인권 개념이 더 보편화된 [[20세기]]에 타 국군들보다 선진적이었던 [[미군]]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는 뜻이 된다.], 똑같은 조건의 잠자리에서 자고, [[행군]]할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같이 짐을 지고 걸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 장교들에게도 체력 검사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진급 심사 요건이다.] 군참에 병사가 우물을 다 파기 전까지는 장수는 목 마르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오기는 그런 점에서 실로 현명한 통솔자였다. 이러한 오기의 일화는 [[군대]]에서 [[정훈교육]] 시간이나 지휘관이 훈화하는 시간 등에 단골로 언급되며, 같은 이야기가 《[[육군]] [[수양록]]》에도 짤막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아내를 죽인 일화나 어머니의 죽음을 묻어둔 채 무덤조차 찾아가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병사를 선대했던 오기의 본심은 언급되지 않아서 오기를 그저 병사들에게 자애롭던 훌륭한 장군 정도로 알고 있던 [[군필자]]들은 나중에 오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놀라기도 한다. 여담으로 문후는 [[악양]]이란 장수도 등용했는데, 악양은 [[중산|중산국]] 정벌 때 그곳에서 벼슬살던 그의 아들이 고깃국이 되자, 거리낌 없이 그 국을 마셔버리고 공격을 계속한 일화로 유명하다. 훗날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 전역을 유린한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의 명장 [[악의(전국시대)|악의]]가 바로 악양의 손자였다. 독하기로는 악양도 오기 못잖았던 셈인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후로 다시 중용되지 않았지만 오기는 위나라에서 꽤 오래 활동했다. 비록 군사는 아니지만 [[서문표]] 역시 문후 시대의 인물이었는데, [[하백]] 신앙 때문에 [[인신공양]]을 하던 마을을 개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당히 인재풀이 좋았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