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대십국시대 (문단 편집) == 오대 == [include(틀:오대십국 왕조)] ||[[파일:external/www.bongkim.com/Zs5nN3nj.gif]]||[[파일:external/www.bongkim.com/DzQg9e31C.gif]]|| || 후량-후당 교체기(923년)의 지도[* 당나라 안남도호부였던 [[베트남]] 안남 [[베트남/역사#s-4.1|응오 왕조]](주황색 나라)가 포함되어있다. 남청색은 태원의 이극용의 영역][* 다만 지도에 오류가 있는 것이 한반도 전체가 신라 영역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기 당시 신라는 이미 후백제나 후고구려 등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한반도 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경상도 일대로 영토가 줄어든 뒤였다.] || 후주 건국기(951년)의 지도 || 오대 왕조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후량]](後梁, 907년 ~ 923년) 1. [[후당]](後唐, 923년 ~ 936년) 1. [[후진]](後晉, 936년 ~ 946년) 1.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後漢, 947년 ~ 951년) 1. [[후주]](後周, 951년 ~ 960년) 이들은 중앙의 정통왕조로 분류되는 다섯 왕조이며,[* 이유는 보면 알겠지만 오대의 첫 왕조인 후량부터가 당나라의 선양으로 건국되었으며 이후 오대를 거쳐 '''송나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다섯 왕조들의 흥망성쇠가 오대십국이라는 연대의 중추가 된다. 물론 "후"라는 이름은 전부 훗날 붙여진 것이다. 연대를 보면 알겠지만 2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하나도 없었고, 다섯 왕조를 모두 합쳐도 고작 53년밖에 가지 않았다. 단명왕조인 전국시대 통일 후의 진나라, 오호십육국시대에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과 [[후연]], 또는 오호십육국을 처음으로 잠시 통일한 [[전진]]이나,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보다 더 짧다. 심지어 후한은 고작 4년이다. 단, 후한은 북한까지 합치면 오히려 오대 중 가장 오래 존속된 나라라고 볼 수도 있다. 이 5대 왕조는 내부적으로 하나같이 [[막장]]스러웠던 역사를 자랑한다.[* 통치를 막장스럽게 했다기보다는 왕조의 안정성이 굉장히 취약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1. 후량의 [[주전충]]은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과정이 굉장히 비윤리적이고 잔인했던 사람이었으며 사생활 면에서도 굉장히 음란하여 며느리랑 간통하던 인간으로, 결국 아들의 손에 처참히 죽었다. 1. 후당의 [[이존욱]]은 전쟁 면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웠지만 결혼 한번 잘못해 막장 인성을 가진 황후를 만난 것과 지나친 음주가무, 그리고 어이없는 중과세 등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 후진의 [[석경당]]은 왕이 되고 싶어서 적국의 왕인 야율아보기와 내통해 통째로 [[연운 16주|땅]]을 바쳤고 거란을 상국으로 떠 받들었다. 그렇다고 통치를 잘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1. 후한은 4년 만에 망해버려 '''최단명 정통왕조'''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1. 후주는 잘 가나 싶더니 세종이 죽자 그대로 무너졌다. 다섯 왕조의 국호를 보면 흥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양(梁)을 제외하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그 이전의 메이저한 통일 정통 왕조의 이름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당 → 진 → 한 → 주)]] 그리고 후주의 뒤를 이어 탄생해서 통일 왕조를 수립한 [[송나라|송]](宋)은 본래 [[상나라|상(은)나라]]의 후예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것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주나라]]가 상나라의 후손들을 위해 분봉해 준 땅이 송나라였다. 참고로 [[하나라]] 후손에게 분봉한 나라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기나라]]였다. 특이한 점이 있는데, 처음부터 서로 적국이었던 후량과 후당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시조가 전 왕조 시조의 측근이었다는 것이다. 1. 후량의 시조 [[주전충]]은 하남군벌의 거두였다. 1. 후당의 개조 이극용은 산서군벌의 거두였으며 후당의 2대 황제인 명종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아들로, [[이존욱]]의 인척이자 장수였으면서 반란으로 황위를 획득한 인물이다. 1.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그 이사원의 측근이자 사위였다. 1. 후한을 세운 [[유지원]]은 그 석경당의 측근이었다. 1. 후주를 세운 [[곽위]]는 또 유지원의 측근이었다. 1. 아쉽게도(?)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곽위의 양아들인 [[시영]]의 측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국가가 난립한 듯 하면서도 연속성이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나라 한번 바뀌면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오호십육국시대]]와는 달리 이 당시 중원의 혼란기는 갈린 것은 황성과 국명뿐이고 나머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1인자가가 제거당하고 대신 2인자가 제위에 오른 것일 뿐. 위에서 언급한 [[풍도(오대십국시대)|풍도]]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아랫사람들과 정치 체제는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주전충 때 당나라 기득권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일이 있었고, 풍도가 '난세 처세술의 달인' 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그렇지, 이 시대의 관료나 백성들에게 있어 오대십국시대는 이전 시대처럼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 실세가 바뀌면 싹 갈려나가고 피바람이 부는 그런 시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당 왕조 교체기쯤 되면 당나라 때의 명문가들이나 기득권들도 다시 어느 정도 존중을 받기도 했었고[* 이존욱이 제위에 오르겠다고 했을 때 이존욱의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장승업이 다시 당나라 황족을 왕위에 올려야 된다며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홧병으로 죽었던 일이 이 때의 분위기를 어느정도 짐작하게 해 준다. 분명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적인 분위기가 있기는 했다.], 그 때 만들어진 관료조직이 왕조가 바뀌어가는 과정에서도 송나라가 건국될 때 까지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풍도가 특별히 처신을 잘 했다기 보다는 당시 세태가 왕조가 바뀌는 정도였지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는 것. 그러니 단명왕조의 연속이었던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생각보다는 안정적이었다. 이는 중화의 헤게모니 자체가 혈통이 다른 지도자로 바뀌면, 즉 역성혁명이 일어나면 나라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요구되었던 동아시아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이 자주 바뀐 것이지 유럽이었으면 단일 국가로 지속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로마 [[군인 황제 시대]]나, [[카페 왕조|카페]]에서 [[발루아 왕조|발루아]], [[부르봉 왕조|부르봉]]으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왕위 교체 시기, [[장미 전쟁]] 시기의 잉글랜드 같은 유럽의 왕위계승 혼란기와 거의 유사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왕조 하나가 10년 겨우겨우 넘겨가며 단명했던 이유도 역설적으로는 왕조가 바뀌어 봐야 손해보는 사람이 이전 왕조의 황제나 그 가문들 정도나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관료들이나 선비, 백성들의 경우는 왕조가 바뀌더라도 안정적으로 자기 안녕과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왕조가 바뀌는 데 저항할 필요가 없었으니 반발도 적었다. 주전충이 당 애종에게 선양이라는 형태로 황위를 넘겨받은 이후에는 왕조가 바뀌는 과정이 철저하게 힘과 힘의 대결로 이뤄졌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선양이라는 형식을 구태여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분이라는 게 덜 중요한 사회이기도 했지만,한편으로는 명분이라는 걸 구태여 따져가며 살던 시대보다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부분이 있었다는 게 동전의 양면같은 이 시대의 오묘한 부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