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멸망전 (문단 편집) == 평가 == >손침을 제거한 것 빼고는 손휴 정권은 딱히 잘한 게 없었고 촉이 위에게 항복했을 때인 264년에 손휴는 죽는다. 이 위급 상황에 황제에 등극한 것이 20대 초반이던 손호로 예전 황태자였던 [[손화]]의 아들이다. 손호는 오나라에 힘을 북돋아 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손호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들 어떠랴. 어찌됐던 간에 긴 관점에서 보면 어차피 진나라에 질 터였다. > >일반적으로 손호를 부도덕적이고 강압적인 군주라 비난받는데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몇 개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많은 부분이 망국의 군주는 부도덕하며 마땅히 망할만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손호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잔혹하거나 성급한 행동은 나오기 마련이다. > >보다시피 창립자인 조조, 유비, 손권 이후 매우 적은 숫자의 후계자만이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나라의 정부가 좀 더 생기있고 중앙 집권적이었다면 260년대의 재앙에 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나라 조정의 혼란은 국가 자체가 근본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며 창립자 이후 어떤 군주라도 실권을 갖기는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 > >이런 내부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나라가 오랜 기간 동안 독립을 지킨 이유가 있는데 '''바로 협곡부터 바다까지 길게 나있는 장강이다. 당시 군사력으로는 이 장강을 뚫고 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긴 어려웠다.''' > > (중략) > >...'''그렇기에 당시 전투에서는 수비측이 극도로 유리했으며, 적이 약점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적이 내보인 취약점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합리적인 전술이 되었다.''' 기다렸다가, 약점을 파악하고, 공격한다는 프로그램은 빠른 판단력과 용기가 필요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수비측에 유리했다. 군령장 같은 것을 쓰고 온 것이 아닌 이상 조금 정도의 후퇴는 복구 가능했고, 준비 잘 된 수비벽을 뚫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기에 공격자는 언제든지 균형을 잃고 무너질 수 있었다. > >이 이론은 수군에도 적용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적벽에서의 패배 이후 조조는 강릉과 강릉 수군을 잃었다. 이 때문에 위의 수군은 한수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고 이 길은 늪과 습지대를 지나야 했고 측면공격에도 취약했다. '''한수를 제외하면 위나라에게 장강으로 통하는 길은 없었고, [[조비의 남정|조비가 장강 하류에서 도하를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이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강변에 구축된 진지가 없기에 배는 언제나 회수에서 운하나 육로수송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이것만으로는 오나라의 수군에 상대가 안 됐다. 강릉, 무창, 유수구 그리고 건업에 있는 수비군은 필요한 곳 어디든지 지원을 갈 수 있었고 '''오나라 손에 수군이 있는 한 북쪽에서의 공격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 >당연하게도 오나라 역시 장강을 벗어나 땅을 얻는데 실패했으며, 합비와 수춘의 방어선을 결국 뚫지 못하고 장강과 회수 사이는 양측의 숩격과 파괴로 무인지대가 되어 버린다. 인구와 확장의 측면에서 이 오랜 대치는 오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마지막에 촉이 항복하자 위는 상류로부터 수많은 수군을 보내 오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다.''' >----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평가[[http://rexhistoria.net/index.php?mid=history_discuss&page=2&document_srl=173813|#]] 만약 손호가 폭정을 펼치지 않았으면 이보다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하는 시각[* 왕준이 오나라 정벌을 주장할 때 의견 중에 손호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세워지면 강력한 적이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도 있는데, 17년을 버티긴 했지만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결국 오도 멸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촉한이 존속한 상황이면 몰라도 촉한이 망한 순간 이미 세력균형은 서진으로 쏠려버렸고 게다가 오(吳)의 군사력이 감당하기엔 전선이 너무 넓어졌다. 촉한이 망한 순간 위진은 오나라를 공략할 고속도로를 얻었다. 가뜩이나 양번이 서진 영토라 육지로 남군과 이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파촉까지 넘어갔으니 오나라의 형주는 서쪽과 북쪽의 적을 모두 막아야하는 형국이었다. 괜히 [[등애]]가 촉한 멸망 직후에 수년 후에 손오마저 정복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다. 이때 손오는 아직 [[손휴]] 치세였고, [[육항]], [[주적(삼국지)|시적]], [[정봉]] 등 유능한 상장들이 생존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기다 손휴가 죽을 것을 감안하고 저 말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손휴는 고작 30세에 들어간 젊은 황제였으며, 손호가 황제가 된 것도 손휴 사후 복양흥의 결단 때문이지 원래는 손휴의 아들이 태자로 있었다.] 다만, 등애나 왕준 모두 의견을 개진한 시점이 고령의 나이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즉, 자신의 생전에 직접 천하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70세 즈음으로 추측되는 등애나 70대인 왕준이 해당 주장을 하는 시기를 넘겨버리면 군에 종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상황이므로 오를 정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설득력이 높은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이 당연하다. 종합하자면 촉을 점령함으로써 오나라는 이전보다 더 취약해졌던 상황(손휴 역시 오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죽었다.)이었고, 왕준의 주장은 지금 오가 어지러울 때 무너뜨릴 수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면 기껏 오나라를 공격한다고 준비했던 것들이 망가지니 미룰 이유가 없다는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다만 손호의 실책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육항이 죽을 때 촉이 망하는 바람에 서릉(=이릉)을 방비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면서 군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손호는 듣지 않았고, 왕준의 계략에 넘어가 서릉 방면 담당자를 변경하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오언이 왕준이 배를 준비하는 것을 눈치채고 군사 보강을 청했을 때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진서 무제기를 보면 진나라로 투항하는 장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게 [[보천]]의 배신으로, 육항이 아직까지 살아있어 신속하게 진압되었기에 망정이지 그가 죽은 뒤였으면...] 그리고 이 중에는 [[팀킬|종실인 손씨들도 여럿 있었다.]] 이는 내부 정치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하며 치열하게 투쟁한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것이 오나라의 멸망이다. 오 멸망전은 서진의 대오전선 군비확충 > 물량에 압살되기 시작 > 최전방 관리자들 패사 > 정예 총동원해 벌인 대회전 패배 > 대세가 기울자 투항 & 귀부 & 도주 > 새수 반납 등 침략전 성공의 정석을 밟아가면서 단계적으로 시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오나라도 만만치 않게 저항했다. 두예의 파죽지세로만 기억되는 오나라의 멸망전이지만 사마주가 오군 5~6만명을 전투 끝에 참수하거나 항복시켰다는 기록,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 장제가 이끄는 3만명이 불리한 상황에서 일대 회전을 벌여 일부 진군의 항복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패했다는 기록, 장강 중류의 핵심 방어거점인 강릉의 군대가 두예에게 저항하다가 격파되었다는 기록, 곽마의 난으로 수만명의 군대가 난을 진압하기 위해 싸우러가서 병력이 분산되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이렇게 오군은 각지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열세를 뒤엎진 못했다. 이 전쟁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형([[육안(손오)|육안]], [[육경]])을 잃었으며 본인도 포로 신세가 된 [[육기]]는 오멸망전을 두고 자신의 저서 변망론에서 '손호 치세 초기엔 자신의 아버지 [[육항]]을 비롯한 뛰어난 신하들이 보좌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죽고 이들의 공백을 미쳐 채우지 못했던 시기에 진이 처들어와 오가 망한 것이지 촉이 망해서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오나라에 여러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위기를 막아낼 능력이 있는 장군들과 신하들이 존재했었고 오가 망하는 그때는 마침 그럼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육기는 아버지 육항의 시대와 오멸망전을 동시에 겪은 세대인 만큼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오나라의 지휘관들을 비교할 수 있었던 입장이라 이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오멸망전 시기에 동오는 이전까지 동오 최고의 명장들이었던 육항, 시적, 정봉에 버금가는 인재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서진 쪽에서도 인정한 사실인데, 서진의 명장 [[양호(삼국지)|양호]] 또한 [[육항]]이 살아 있을 시절에는 공격할 생각을 접고 대치하는 것으로 응하다 육항이 죽고 나서야 동오 정벌을 주장했다.] 역시 오나라의 장수였던 [[오언]] 역시 '손호는 영명한 군주였고 뛰어난 신하들이 그를 도왔으나 대세를 역전시키는 데는 실패했을 뿐'이라고 사마염 앞에서 술회한 것을 보면 당대 오의 패장들 입장에선 불과 몇년 전 선대에 비해 오가 멸망할 당시엔 좋은 장수가 많이 없었고, 열심히 싸웠지만 상황이 중과부적이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을 완수한 서진은 통일과 거의 동시에 기강이 헤이해졌고, 20여년 후, 팔왕의 난에서 사마씨 본인들끼리 싸우며 국력을 낭비하는 한편, 매년 일어나는 홍수, 우박, 지진 등 자연재해,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군 덕에 마침내 이민족에게 2명의 황제가 죽는 치욕을 겪게 된다. 또한 서진 말에는 북방 이민족과 청주에서 들고 일어난 왕미 말고도 형주, 양주 일대에서는 두도, 진민 같은 반란군이 활동했는데 이는 사마예, 왕도, 왕돈, 도간 등의 활약으로 진압하며 진 황실은 오나라 손씨가 발전시킨 강동에 의지하여 버텨나가게 된다. 동진은 옛 오나라와 비교했을 때, 회남을 소유하고 있었고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내려오는 유민들로 인해 군대와 인민도 그보다는 더 많은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오나라 손씨정권이 낙후된 강남을 80여년간 열심히 개발했기에 동진은 그 기반 위에서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세력구도가 6:2:1로 평가되는 삼국 시대 위:오:촉한 구도와는 달리, 동진은 적어도 3 정도는 되었고 6이라 할 수 있는 화북 지역은 조씨의 위나라가 화북을 통일했을 때와 달리 [[오호십육국시대|오랫동안 통합이 어려운 상태]]였던 것도 동진 이래 남조가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어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