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상민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파일:/image/295/2010/01/10/8.jpg]]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이 시기 굉장히 마른 오상민을 보고 김성근 감독이 직접 벌크업 프로그램을 가동해 몸을 만들었다.] [[파일:external/www.sksports.net/Large_2001073123152824822_481.jpg]] [[SK 와이번스]] 시절.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군산초등학교, 군산중학교,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업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프로야구/1997년/신인드래프트|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그는 입단했을 당시 재능으로는 역대 좌완투수 중 최강이라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로 유망주였다.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업고등학교]] 시절 1992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타율왕 출신이었으나 타자들 방망이 부러뜨리는 재미를 느껴 투수로 진로를 택했다. 하지만 너무 재능만 가지고 야구를 한다는 평가도 나왔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이에 대해 오상민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대충 던지는 것 같이 보여도 본인도 공 한 개 한 개를 신중하게 많이 생각하며 투구한다고 말했다.] [[한국프로야구/1997년|1997년]] 데뷔 때부터 줄곧 [[중간계투]]로 등판하였으며, SK 와이번스로 바뀐 후에도 [[한국프로야구/2001년|2001년]]까지 4년 간 60경기 이상을 출전하는 철완을 과시했다. 특히 당시 SK 감독이 투수들 팔 갈아넣기로 소문난 [[강병철]]이었다.[* 하지만 당시 쌍방울의 전력을 이어받은 SK에는 승리조는커녕 소위 버리는 경기를 위해 던져줄 투수조차 없을 정도로 투수진이 처참한 상황인지라 누군가는 과부하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팀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2년 동안 불펜으로 100이닝을 넘게 먹었음에도 10년이나 더 살아남았는데, 2001년에는 놀랍게도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평균자책점 3.57을 기록했고,[* 신문에서는 그의 삐쩍 마른 몸매를 보며 골투라고 표현했다.] [[선발 투수]]로도 간간히 등판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살려조]]로 꼽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딱 [[송창식(야구선수)|송창식]], [[장민재]]의 좌완버전. 그래도 오상민 본인은 혹사를 인정하면서도 이 당시에 커리어 하이였기도 하고 아픈 곳도 없었기 때문에 야구장에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고 한다.] 어쨌건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전체적으로 훌륭한 중간계투였지만 특히 [[LG 트윈스]]만 만나면 그야말로 최종병기 수준. 좌타 위주의 LG 타선을 매우 훌륭히 공략했던 투수. 당시엔 LG 팬들은 오상민이라면 학을 뗐다. 현역 시절 평균 구속은 140km/h대 초중반이었고, 최고 구속은 149km/h였다.[*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 본인이 직접 밝혔다. 선수 시절 제일 아쉬웠던 점으로 150km를 던져보고 싶었는데 단 한 번도 150km를 던져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다고. 하지만 오상민은 좌완 투수로, 그런 선수가 140km/h 후반을 찍었다는 것만 해도 구속이 느린 투수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파일:external/www.samsunglions.com/img_history21_7_12.jpg]] [[삼성 라이온즈]] 시절. [[한국프로야구/2001년|2001년]] [[12월 20일]] [[틸슨 브리또]]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고 [[한국프로야구/2002년|2002년]] 이후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비롯하여 2005, 2006 한국시리즈에서는 홀드까지 따내며 팀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좌완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김응용]] 감독의 입김이 강하게 있었다는 후문이다. 6:2 현금 트레이드로 오상민, [[틸슨 브리또]]+11억↔[[김기태(1969)|김기태]], [[김동수(야구)|김동수]], [[김태한]], [[김상진(1970)|김상진]], [[정경배]], [[이용훈(야구)|이용훈]]이었다. [[이용훈(야구)|이용훈]]을 제외하면 당시로는 한물가거나 [[김응용]]과 코드가 안 맞은 노장들.] 이상한 건 그가 잘할 때는 삼성이 우승을 못했고 그가 부진할 때 삼성이 우승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팀이 3번째 우승을 이뤄낸 2006년 16홀드를 기록하며 홀드 5위를 달성하며 불펜진에서 삼성의 우승에 기여한 바가 있다.] 허나 아래에서도 언급할 사생활 문제 때문인지 [[한국프로야구/2007년|2007년]] 삼성에서 방출된 후[* 이 무렵 팔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한국프로야구/2008년|2008년]] 시즌 중 LG 트윈스에 입단 테스트를 거쳐 이적했다. LG 입단 이후 등판할 때마다 그럭저럭 쏠쏠히 활약했다. 2009 시즌에는 또 사생활 문제로 법정에 서는 바람에 한 달 넘게 경기에 못 나왔음에도 133경기 체제에서 무려 63경기나 등판했다.[* 딱 김재박이 01현대에서 신철인을 써먹던 방식을 그대로 써 먹은 셈이다.] 특히 석방된 다음에는 팀이 이기든 지든 거의 매일 나오다시피하면서, 그야말로 노예마냥 굴려졌다. 2010 시즌에는 혹사 논란까지 나올 정도로 LG 불펜의 필승조로 뛰었는데, 되려 삼성 시절보다 구위가 더 좋아졌다. 이 정도면 길들여진 수준이다. 37살의 베테랑 투수를 혹사시킨 박종훈도 여러모로 대단하다. 하지만 고질적인 사생활 문제 때문이었는지, [[2011년]] [[4월 26일]] LG 트윈스에서 [[웨이버 공시]]되면서 방출되었고 결국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방출 당시 성적은 1점대로 제법 준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