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세응 (문단 편집) == 생애 == 1933년 [[경기도]] [[안성시|안성군]]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48회),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시|광주군]]([[성남시]] 분리 전)-[[이천시|이천군]]-[[여주시|여주군]] 선거구에 신민당 후보로 [[유기준(1924)|유기준]]과 복수공천을 받아 오세응 본인만 당선되었다. 1978년 [[이철승]] 대표 체제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신민당을 탈당하고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9년 6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한병채]], [[박찬(1924)|박찬]], [[김현규]], [[이상민(1942)|이상민]], [[예춘호]], [[손주항]] 등과 신민당에 복당하였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신군부]]에 협력하였고,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기도 성남시-광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정당(1981년)|신정당]] [[이대엽]]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2년부터 1983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1985년 같은 지역구에서 민주정의당 공천으로 재선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성남시 을(현 [[중원구]],[[분당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평화민주당]] [[이찬구(1941)|이찬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분당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국회 문화공보위원장, 1995년부터 1996년까지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당시 [[김수한]] 국회의장을 대신하여 본회의를 진행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박준규(1925)|박준규]]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천에서 탈락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7선 중진임에도 불구하고 4.94%라는 처참한 득표율로 [[한나라당]] [[임태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여 8선에 실패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성남, 분당, 용인 지역 전직 국회의원들과 함께 공체제 폐지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사단법인 지방자치제도개선모임 상임대표가 된 이후 2012년 9월 26일 중앙당 공천제 완전 폐지, 선거를 의식해 줄세우기 하는 공직사회 풍토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개선, 시민운동을 통해 10% 시민세금 감세운동 등 3대 역점사업을 범시민운동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2014년 <잘못된 정치, 49%는 국민책임> 이라는 회고록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정치인은 국민이 날카로운 눈으로 항상 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엉뚱한 짓을 못한다"면서"이런 감독을 못하니까 49%의 책임이 유권자에게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http://m.snilbo.co.kr/41527|#]] 2019년 12월 11일, [[숙환]]으로 86세의 나이에 별세하였다. 장지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무두마니 선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