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인 (문단 편집) == 상세 == 19세기 중반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의 [[독일 통일]] 이전 [[독일어권]] 국가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고, 독일인이라는 단어 역시 독일이라는 국가의 국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 계열 [[방언연속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독일 통일 이전에는 오스트리아인 역시 [[독일인]]의 한 갈래로 인식되었다. 다만 오늘날 독일어권 사회가 [[나치 독일]] 관련한 과거사를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범게르만주의]] 관련해서는 오늘날 독일 국민들이나 오스트리아 국민들 모두 경계하는 추세이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오스트리아인과 독일인은 별개의 민족 집단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종교개혁]] 이전 독일어 사용자들은 자신들을 독일인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문명화되고 기독교화된 [[로마인]]의 후예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했다. 독일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부흥하게 된 계기는 근대 [[루터교회]]의 부흥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팽창에 있다. 루터교회의 등장으로 [[라틴어]] 대신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이 보급되면서 독일 민족주의의 성장을 촉진한 시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모하치 전투]]로 [[러요시 2세]]가 죽고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을 상속받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와 달리 반항적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경우 전자는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후자는 [[대튀르크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벌어진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쿠루츠 봉기를 제압하면서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부코비나 공국|부코비나]] 획득과 [[폴란드 분할]]을 통해 상당수의 슬라브인 신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지배층이었던 독일어 화자들은 자신들을 슬라브어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및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등등보다 더 우월한 민족으로 여기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오스트리아 민족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보는 시각도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오스트리아 외에도 [[헝가리]], [[스위스]], [[독일]] 남부에도 거주한다. 상당수의 [[발트인]]과 [[슬라브족]]이 독일인에 흡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인들과 이웃해 살던 슬라브인 상당수가 게르만화되어 오스트리아에 동화되었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경우 상당수의 체코인 관료들이 파견되어 현지 행정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이 새로 파견간 지역에서 업무나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당연히 체코어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어일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상당수의 슬라브 엘리트층이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동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근세나 근대 기준으로는 프로이센을 위시한 북독일은 루터교회 등 개신교권, 바이에른을 위시한 남독일과 [[룩셈부르크]] 그리고 [[리히텐슈타인]]과 오스트리아는 가톨릭권으로 종교 교파를 기준으로 문화권을 분류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68운동]] 전후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 전반이 상당히 세속화된 이유로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구분이 많이 무색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