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자서 (문단 편집) === 배경 및 전반기 === 오자서의 가문은 대대로 [[초(춘추전국시대)|초(楚)나라]]의 국왕을 측근의 위치에서 보필한 명문가로서 [[초장왕]]의 용장이자 [[필 전투]]의 영웅인 오삼(伍參)를 배출했고, 오자서의 할아버지는 [[초영왕]]의 충신이자 명신으로서 춘추시대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떨치게 만든 오거(伍擧)였으며, [[아버지]] 오사(伍奢) 역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태자 웅건의 [[스승]] 겸 보좌 역인 태부 벼슬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초성왕|성왕]]이 터를 닦고 [[초목왕|목왕]]과 [[초장왕|장왕]]이 그 위에 쌓아올린 강대한 초나라의 패업도 [[언릉 전투]] 이후에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왕실의 내분은 일상사가 되었고, 어질고 총명한 왕으로 촉망받던 [[초평왕|평왕]][* 쿠데타를 일으켜 영왕을 시해하고 즉위했으나, 즉위 이후 백성들을 편안히 쉬게 하고 관리들에게 공정하게 상과 벌을 내렸으며, 국경의 방비도 튼튼히 했다.] 역시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간신]]을 가까이 하고 국정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왕실의 인척들은 속국들에게 가혹한 [[뇌물]]을 요구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또한 초나라가 내부로 썩어가는 와중 동쪽 해안 부족들의 국가인 [[국가]]인 [[오(춘추시대)|오(吳)나라]]와 [[월나라|월(越)나라]]가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아 당시에도 강대국 소리를 듣던 [[진(영성)|진(秦)]]의 힘을 빌려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계획이 입안되었고, 그 계획에 따라 양국은 초의 태자 건과 진의 [[공주]]를 혼인시켜 동맹을 맺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큰 사태가 터졌으니, 바로 '''며느리''' 될 진의 공주 맹영(孟嬴, 백영(伯嬴)이라고도 함)이 굉장한 미인이라 '''[[시아버지]]'''인 평왕이 홀딱 반해버린 것이었다. 왕의 측근 비무기(費無忌)[* 《사기》 〈오자서 열전〉 기준. 《[[춘추좌씨전]]》에는 비무극(費無極)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자서의 아버지인 오사 다음가는 태자의 스승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상의 자리였고 태자를 직접 가르칠 권한은 없었다.]는 오히려 왕을 부추겨 결국 왕이 며느리를 가로채게 만들었다. 대신 태자 건에게는 공주를 따라온 제나라 출신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 어찌어찌 혼인을 시켜버렸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가정 면에서는 이미 충분한 파국이나 엮인 사람들이 왕과 왕자다 보니 파국은 당연히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평왕과 맹영 사이에서 [[초소왕|아들]]이 태어날 즈음 비무기는 늙은 평왕이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을 태자 건이 자신이 평왕을 꼬드긴 걸 알고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해[* 태자 건이 이에 대해 앙심을 품었는지는 미지수이나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대신 결혼한 그 시녀와 [[금슬]]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물론 아니꼬워할 순 있지만 좋은 인연을 만난 입장에서 지나치게 적대했을 거라 보긴 힘들었으니, 비무기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나머지 오버한 것이다.] 평왕을 부추겨 태자와 그 후견인인 오사 및 명문가로 유명한 오씨 집안 자체를 뿌리 뽑고자 했다. 평왕은 처음엔 태자를 건들 생각은 없었으나 비무기의 지속된 간언에 넘어가[* 《춘추좌씨전》에는 비무기가 평왕에게 건의하여 태자 건과 오사를 성보에 보내어 초나라의 북방을 방비하도록 해서 건과 오사가 성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주변국들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비무기가 모함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건을 죽이고자 했고 이런 음모를 눈치챈 태자 건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일찍이 정나라로 도주한다. 상술했듯 숙청의 칼날은 자연스레 오씨 삼부자에게도 향했는데, 춘추좌씨전과 사기의 기록이 조금 다르다. * 춘추좌씨전: 해당 기록에 따르면 오사가 불린 시기는 태자 건이 아직 나라를 벗어나기 전으로, 오사는 왕이 비무기의 간언에 완전히 넘어간 걸 알았는지 자신들이 간다해도 죽을걸 알았으나 사기때처럼 충심탓인지 아니면 시간을 끌어주기 위해서인지 오자서에게 태자와 왕손을 보필해 초나라를 탈출하도록 시킨 뒤 장남인 오상(尙)과 둘이서 왕의 부름에 답해 왕성으로 향했고 이내 처형당했다. * 사기[* 제66권(〈오자서 열전〉 제6권)]: 태자 건이 가솔들을 데리고 도주한 뒤 평왕은 오사를 인질로 잡고 두 아들들에게 두 명이 희생하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교지를 보낸다. 당연히 이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바로 간파했으며 오자서는 형에게 이대로 가봤자 개죽음밖에 안 된다며 우리도 태자처럼 피신해 복수를 하자며 부르짖지만 형인 오상은 오자서에게 자신의 몫까지 복수를 맡기고[*전문 我知往終不能全父, 然恨父召我以求生而不往, 後不能雪恥, 終爲天下笑耳. 可去矣, 汝能報殺父之讎, 我將歸死. 해석하면 이미 아버지가 붙잡힌 시점에서 아무도 가지 않으면 자신들에게는 한이 될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불효로 남을 것이고 둘 다 가버리면 이 치욕을 씻을 수 없으니 자신이 한을 풀고자 아버지에게 향할 테니 오자서에겐 치욕을 씻을 복수를 맡긴 것.] 그대로 왕성으로 떠나 아버지와 같이 처형당한다. 전형적인 '고지식한 충신'이었던 오사는 아들들에게 딱히 복수를 바라지도 않았고,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일체의 두려움이나 억울함은 가지지 않았지만, 둘째 아들의 심리와 재능을 꿰뚫어보고 충언인지 경고인지 '''오자서가 살아 도망쳤으니 초나라는 앞으로 큰 환란을 겪게 되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당연히 평왕도 오자서를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오사 생전부터 [[문무겸비]]에 강직한 데다가 의지가 강한 인물로 소문난 오자서가 그저 도망치고 끝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의 복수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자객]]을 풀었지만 오자서는 왕이 보낸 추격을 죄다 떨쳐내고 그대로 인접국인 정나라로 향했다. 《[[열국지]]》에 따르면 몇몇 자객들이 따라잡았으나 오자서가 죄다 [[활]]로 쏴 죽여 버렸다는데, 그 상황에서 굳이 한 명을 살려 보내면서 "평왕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전해라"고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어버리는 바람에 도피 행각이 더욱 고달파졌다고 한다. 다친 채로 돌아온 자객에게 이걸 전해 들은 평왕은 이젠 진짜로 오자서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90년대 중순쯤에 한국에서 정발된 대만 역사만화 1권짜리에서도 오자서에 대하여 그렸는데, 여기서도 이게 나온다. 자객들을 다 죽이고 하나만 부상입힌 채로 살려보낸다. 다친 채로 일어선 그 자객이 "네놈, 정신이 멀쩡한 거냐? 한나라 군주를 상대로 곧 죽인다고 협박한다고?"라고 외치자 길을 가던 오자서가 쓱 뒤돌아보며 "나는 반드시 해낼 것이니 이 말도 전하거라."라고 말한다. 이 자객에게 보고를 듣은 평왕은 덜덜 떨며 "그놈은 분명히 해낼거다....다른 나라를 선동하여 쳐들어와 과인을 반드시 죽일 거다!"라고 하면서 놈의 목에 금 100관(약 330Kg)과 넓은 영지와 높은 벼슬을 내리겠다라고 오자서의 목을 노리라고 하여 오자서는 이 상금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들에게도 쫓긴다.] 그리고 정나라로 탈출한 태자 웅건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되었다. 이 당시 정나라는 명재상으로 이름 날린 [[자산(춘추시대)|자산]]이 있었으니 강력한 외교 카드로 활용 가능한 태자를 섭섭치 않게 대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불운하게도 오자서가 정나라에 입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산이 병사하고 그 뒤 정나라는 내적으로 큰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결국 이 혼란은 얼마 못 가 친 초평왕 세력의 집권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정정공|정공]]과 집권 세력은 태자 일행을 계속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복수와 권력에 눈이 먼 태자는 이 와중에 '''정나라 공작위를 찬탈한 뒤 정나라 군대를 동원해 초나라를 쳐 왕위를 되찾는다'''[* 정확히는 정나라의 백작위에 오른 다음 그 군사력으로 초나라를 치겠다는 것. [[열국지]]에 따르면 합리적인 이유로 진나라가 상술한 계획대로 태자가 움직여 준다면 같이 호응해주겠다는 약조를 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언급되지 않아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는 어이·상식·양심을 쓰리쿠션으로 날려먹은 계획을 세웠다. 오자서는 결사반대하며 이런 이유를 들었는데 >1. 정나라는 힘이 약해 도저히 초나라를 칠 수 없다. 애초에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눈치나 보던 정나라였다. >2. 무엇보다 떠돌이 거지 꼴인 태자를 받아주고 국빈으로서 후한 대우를 한 정공을 배신하는데 천하가 우리를 따르겠느냐? 정공을 차지한다고 해도 반감이 심해 결국 뒤엎어지는 일만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이유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태자 건은 기어코 이걸 묵살해버렸다. 결국 이 계획을 첩보를 통해 들은[*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태자의 노예가 몸이 아파 제대로 일하지 못했는데 태자가 구타하려고 하기에 달아났다가 이걸 들었던 걸 고했다고 나온다. 정공은 '거지같은 놈을 환영하고 후하게 대우했더니 내 나라를 빼앗겠다고?'하며 분노했고, 여기서는 태자가 정나라 병사들에게 등짝에 칼이 박혀 끔살당했다.] 정공은 제대로 노해 그대로 태자와 그의 아내를 처형해 버린다. 오자서는 한 발 앞서 태자의 아들 웅승을 데리고 도주한 덕분에 살아남지만, 초나라에 이어 정나라에서까지 지명수배를 당해버린다. 오자서는 무사히 도주하긴 했지만 그 앞날이 밝다고 할 수 없었다. 가족의 복수는 물론이요 자신이 맡게 된 태손 '승'도 훌륭히 키워야 할 의무를 짊어진 셈이었는데, 당장 처지는 도망자 신세에 급하게 나오느라 여비가 될만한 귀중품도 챙겨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자서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정나라는 초나라 '''북쪽'''([[정저우시]])에 위치한 나라고 오나라는 초나라 '''남동쪽'''([[쑤저우시(장쑤성)|쑤저우시]])에 위치한 나라였다. 한마디로 '''초나라를 통째로 가로질러야 했다'''. 사료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대충 '''지명수배 당한 와중에 [[의정부]]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걸어서 돌파해야 하는 셈'''이다.] 한창 위세를 떨치는 [[오(춘추시대)|오(吳)나라]]에 의탁하기로 한다. 초나라로의 입국 자체는 마침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친우 신포서의 배려로 성공했으나 이후 무일푼으로 횡단하느라 때로는 사냥꾼으로 때로는 구걸로, 때로는 뱃사람으로 위장하며 근근이 하루하루 버텨 가면서 가까스로 초·오 국경 지대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창 분쟁이 심한 오나라와의 국경 지대의 방비는 엄청 견고했기 때문에 오나라로 밀입국하기 매우 힘들었다. 이 최대의 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긴 오자서는 마침내 그리도 바라던 오나라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다.[* 오자서는 원체 기골이 장대해 체형만으로도 들키기 쉬웠으며 초에 입국할 때와 달리 주변에 도와줄 지인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고심하느라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하룻밤 새 머리가 희게 세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탈출 과정을 다룬 대표적인 일화로는 자신이 추격대에게 쫓기던 와중 강 때문에 도주로가 가로막히자 결국 포기하려던 찰나, 어느 늙은 뱃사공이 배에 태워 강 너머로 보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자서는 이 뱃사공에게 은혜를 갚고자 자신의 보검을 넘겨주려 했으나, 이 뱃사공은 '''지금 오자서란 사람을 잡으면 천금을 준다던데 그깟 보검이 뭐 대수냐'''며 받기를 거부하였고, 이름이라도 알고자 하는 오자서에게 '''둘 중 하나가 잡히면 다른 하나 이름 안 불 거라고 확신해? 그냥 모른 채로 가자'''며 쿨하게 떠났으며 오자서는 이런 그에게 무릎을 끓고 감사를 표한 뒤 본인도 길을 떠났다. 어느 한 야사에서는 위의 일화와 정반대로 구해준 뒤에도 오자서가 세 번을 그를 의심하며 질문하자 이에 빡친 뱃사공이 '죽음으로 믿음을 증명하면 되겠느냐'며 그대로 강에 뛰어들어 익사했고 이에 오자서가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오자서가 검을 끌러 보답을 하려 했다 하여 이 일화를 기리기 위해 훗날 만든 해검정(解劍亭)이라는 정자가 지금도 남아있다. 《열국지》에서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의 묘사가 더 추가되었다. 오자서는 우연히 동고공이라는 노인의 도움을 얻게 되었다. 이 때 동고공이 한 가지 묘책을 고안해 주었다. 동고공의 지인인 황보눌을 변장시켜서 관문의 병사들이 오자서로 오인하게 만들고 그 혼란을 틈타 빠져나가게 한 것.[* 이때 동고공이 황보눌을 데려오는 사이에 동고공의 집에서 기다리던 오자서는 동고공이 초나라 군사를 데리고 올까 봐 고심하다가 머리가 세었다고 저술한다.] 이로 인해 오자서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오자서가 복수에 성공한 후 동고공에게 보답하기 위해 거처를 방문했으나, 이미 동고공은 어디론가 떠나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그리고 어부가 오자서를 살려보냈다는 설화에는 이야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먼 훗날 오자서가 오나라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헌공]]이 온 나라에 SOS를 발령하는데, 한 젊은 어부가 '내가 하는 걸 보라'며 나서더니 배 젓는 노 하나를 들고서 오자서의 도피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부르며 오나라 군영으로 혼자 들어갔다. 이 젊은 어부는 바로 사공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섬찟한 오자서는 어부가 진 노가 옛날 그 사공이 쓰던 노임을 알아보고 "그때의 일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터…분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군사를 물리겠다"며 정말로 진격을 중지했다. 정헌공은 이 어부를 대부로 모셨으니 사람들은 그를 '어대부(漁大夫)'라 불렀다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