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정조 (문단 편집) === 북송 시기 === 960년, [[진교의 변]]이 일어나 조광윤이 수도로 돌아오고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였다. 북송이 건국되자, 오정조는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 원래 동중서문하평장사지만 아버지의 이름이 장(璋)이었기 때문에 이를 동중서문하삼품이라고 하였다.]이 더해지고 추밀사를 맡았다. 같은 해, 노주(潞州)에 주둔하던 [[이균]]이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오정조는 태조에게 다음의 계책을 바쳤다. >노주는 험하고 또한 태행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이균이 태행산을 점거하고 있다면 쉽게 무너뜨리기 어렵습니다. 이균은 본디 용맹하지만 경박하니 만약 이균을 재빨리 공격하면 반드시 상당(上黨)을 벗어나 자진해서 우리를 요격할 것이니, 산짐승이 자신의 산림을 잃고 물고기가 못을 벗어난 것처럼 이균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가 이균 토벌을 준비할 때 오정조는 동경유수 겸 판개봉부(判開封府)가 되었다. 그리고 오정조의 예측대로 이균은 과연 군대를 이끌고 택주(澤州) 남쪽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다시 [[이중진]]을 토벌할 때 동경 유수를 맡았다. 961년, 태조가 오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웅무군(雄武軍) 절도사로 삼았다. >경이 추밀원의 사무를 관장한지 1년이 지났는데, 경을 진주(秦州)로 보내서 쉬게 하고 싶소. 내일 제서가 나오는데 경이 짐의 좌우를 떠나는 것을 근심할까봐 먼저 경에게 알리는 것이오. 진주의 석양진(夕陽鎭)은 옛 복강현(伏羌縣)으로 목재가 많았다. 오정조가 부임하기 이전에 지진주를 맡았던 고방(高防)은 채조무(采造務)를 설치하도록 건의하고 군졸들을 징발하여 번갈아가며 석양진의 목재를 조정으로 보냈다. 하지만 고방과 소수민족의 추장인 상파우(尙波于)가 서로 목재를 놓고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고방은 상파우의 무리를 체포하여 상황을 조정에 알렸다. 고방을 대신하여 진주로 부임한 오정조는 태조의 조서를 가지고 상파우를 사면하였으며, 오정조의 성의에 탄복한 상파우는 복강현을 조정에 바쳤다. 964년 내조하여 다시 경조(京兆)에 진수하였다. 971년 태조의 생일인 장춘절(長春節)에 내조하였고 뒤에 병에 걸렸다. 조광윤이 직접 오정조의 병세를 살폈고 왕계은을 보내 오정조의 치료를 맡도록 명했지만 얼마 안 있어 오정조는 사망하여 시중(侍中)으로 추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