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쿠시리초 (문단 편집) == 역사 == 섬 남부에서 집터가 여럿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 660년에 [[아스카 시대]]의 장군인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미시하세(粛慎)[*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숙신]]이다. 만주에 있던 퉁구스계 부족인 숙신과의 관련성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뒤의 기록으로 보아 [[에미시]]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미시하세를 [[니브흐족]]의 선조로 보기도 한다.]의 세력권이던 弊베로베 섬(弊賂弁嶋, ベロべ)를 정벌했다는 기록에서 베로베 섬이 오쿠시리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454년에 마츠마에 번 번주 가문의 조상인 다케다 노부히로(武田信広)가 표류하다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720년에 '오쿠시리'라는 명칭이 처음 나온다. 1885년에는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아 힘든 시기에 술을 마시는 어부들 때문에 촌장이 [[금주령]]을 내렸다고 한다. 1906년에 섬에 존재하는 4개의 자연촌(自然村)인 츠리카케(釣懸), 아카이시(赤石), 아오나에(青苗), 야쿠시(薬師)를 합쳐서 오쿠시리무라(奥尻村)가 탄생했으며 1966년에 정(町)으로 승격되었다. 1993년 7월 12일에 섬 북쪽 연안에서 발생한 [[매그니튜드|M7.8]], [[진도(지진)|진도]] 6짜리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175명 사망, 27명 실종, 48명 중상, 주택 426채 완파'''라는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섬 남부 아오나에(青苗)에는 섬 해안을 타고 온 쓰나미와 본토에서 반사된 쓰나미를 합쳐 최대높이 '''29m'''나 되는 쓰나미가 자고 있던 마을 주민들을 그대로 휩쓸어 버렸다. 지진 발생 '''5분만에''' 쓰나미가 도달했기 때문에 자동차를 이용해서 대피하려고 했거나 시간이 있다고 판단하고 남은 용무를 서둘러 마치려 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파도에 희생되었다. 사실 정사무소에서는 지진 발생 3분만에 "쓰나미 우려가 있으니 고지대로 대피하라"라는 방송을 했고, 실제로 중심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대피했지만 아오나에 지역에서는 집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생존했다. 이는 당시 쓰나미 예보 기술력의 한계를 일깨워줌과 동시에 지진 및 쓰나미 주의보 발령 시 행동요령에 대한 대대적 수정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