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현제 (문단 편집) == 개요 == {{{+3 五賢帝 | Five good emperors}}} [[고대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끈 '''5'''명의 '''현'''명한 황'''제'''를 지칭하는 표현. 현대 라틴어로는 quinque imperatores boni, 그리스어로는 Οι πέντε καλοί Αυτοκράτορες라고 한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면 오현제라는 말은 '''당대 로마인들이나 후대 로마인들이 만든 찬사 혹은 제호 개념 존칭이 아니다.''' 이 단어는 1531년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안에서, 리비우스의 기록을 논평하는 중 [[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다섯 황제의 경우처럼 양자로 승계한 황제가 선정을 베풀었고 여기에서 우리들이 배울 수 있다면서 이들을 묶으면서 시작된 표현이다. 하지만 그 어감이 매우 좋게 느껴지고, [[니콜로 마키아벨리]], [[에드워드 기번]]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로마사 연구자들, 대중 사가에게 '''로마 제국의 국력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단연 로마의 최전성기'''라 일컬어 설명하기 좋아, 대중적 표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실제 로마인 모두 다섯 황제 전체를 평화의 시대였고 완벽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렇지만 오현제로 묶인 이들 중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로 묶여 극찬 받는 그대로 그 평가가 대단히 훌륭했고, 호불호가 없는 명군으로 추앙받아 대제 칭호만 받지 못했을 뿐,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당대에 받은 이칭인 '지고의 황제(최고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받은 대제의 칭호인 '마그누스'가 아니다.][* 네르바 황제는 제위 등극 후 재위 기간도 짧고, 근대 이후 밝혀졌듯이 [[프라이토리아니]]와 [[로마군]]의 친위 쿠데타 후 [[트라야누스]]를 사실상 옹립한 세력에게 강제 연금됐다가 [[뇌졸중]]으로 죽은 황제라서, 명군이나 호불호 없는 황제라고 할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고, 개인 성격 역시 입체적이고 호불호가 분명해, 현군이더라도, 당대에는 [[티베리우스]]와 비교될 만큼 호불호가 분명한 황제로 평가됐다. 따라서 후임자인 양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 연설에서 원로원에게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시키는 투표에서 동의해달라고 읍소했다.] 오현제로 묶인 다섯 황제의 황가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중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은 안토니누스 가문은 가문의 명성과 권위는 1세기 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상으로 대단했다. 어느 정도였는지, 동시대 사람인 [[헤로디아누스]]는 마지막 황제인 [[콤모두스]]까지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함과 고결함을 가졌고, 보랏빛 천을 운명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 받았음을 밝혔다. 이는 헤로디아누스 주장이 아닌 이후 로마 제국의 상황에서도 비슷해, 콤모두스 암살 후 벌어진 193년 [[다섯 황제의 해]]를 정리하고 등장한 [[세베루스 왕조]]는 이 명성을 이용하고자 스스로 오현제의 성씨 중 하나인 안토니누스를 정통성의 칭호로 취하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하여 오현제라는 표현이 인위적 표현라고 한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에 걸맞은 황제들을 배출해온 명성과 존경심은 [[팍스 로마나]]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오현제로 묶인 계보는 [[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진다. 오현제 이후 로마는 황제 난립기 후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안정과 평화를 보내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말의 외세의 침입과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즉위로 시작된 소위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는 혼란기를 거친다. 그리고 이런 혼란은 계속되는 내란과 외침에 따른 혼란 등이 49년간 이어지며 제국의 국력은 서서히 기울어간다. 구글 트렌드에서의 세계적 관심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장 높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다음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네르바가 가장 낮다. 네르바야 재임기간이 짧고 안토니누스는 가장 길지만 조용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사적으로 괴짜였으면서 실용적인 치적을 남긴 것, 트라야누스는 전통적으로 인기가 높았고 영토 확장과 건축 활동, 마르쿠스는 명상록을 저술하고 어려운 시대를 감당한 철학자라는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 조회수도 마르쿠스는 수백만 단위에 이른 것이 조금 있고 수십만 단위도 몇 주나 한 달 만에 달성한 데 비해 나머지 네 명은 1~3년 만에 수십만에 진입한 영상들 정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