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현제 (문단 편집) ==== 내부적 모순과 문제들 ==== 세상에 완벽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시피,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와 쇠퇴의 원인은 다름 아닌 오현제 시기부터 누적된 문제 혹은 시작된 문제가 쌓여왔던 것이 컸다. 물론 오현제 시기와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 사이의 70여 년간, 노예 공급이 감소하던 사회 구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군대 개편과 방어선 재구축 등을 바탕으로 3세기의 위기 당시 [[게르만족]]에게 급속도로 털리는 상황은 유능한 황제였다면 최소화시킬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같이 군사적 재능과 행정가적 능력, 법률가적 지식까지 두루 갖춘 로마 황제가 매번 나올 리 만무했고, 설령 그런 황제들이 나오더라도 오현제 치하 아래에서 수십년 간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4세기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혹은 그 다음 시대의 [[발렌티니아누스 1세]] 같은 명군조차도 벅찬 문제였다. 더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제위를 물려받은 [[콤모두스]]가 나라를 말 그대로 방치했고, 콤모두스 암살 후 혼란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말끔히 정리했어도 로마 제국의 프린키파투스는 기본적으로 늘 내부적 문제가 많은 국제였다. 오현제 치하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부분은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고질화를 넘어 중병화되기 시작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전통적 관점 하에서 트라야누스를 평가하는 이들에게는 의외일 수도 있는데, 1940년대 이후 고고학 발달과 로마 유적, 유물, 비문 발견과 해석 나아가 사회과학분야 전문학문들의 역사연구 연계 확산 하에서 트라야누스의 치세는 도금된 영광이나 다름없을 정도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실질적인 오현제 시대로 불린, 트라야누스의 치세가 시작될 당시, 로마 제국은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 ~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까지 취한 서유럽과 이탈리아 일대 경제력 향상 및 황무지 개발, 가이우스 ~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연이은 이탈리아 및 로마 일대의 항구 개발과 농경지 확보, 도시 공업 발전 등에 힘입어 경제적 취약성을 극복하는 듯 했다. 이는 네로 치하에서 화폐 가치 절하, 베스파시아누스 아래에서 진행된 속주 경영을 통해 얻은 세수 확보 및 관리를 통해 국가 재정이 속주 경제 및 속주세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진행되면서, 황제가 대규모 전쟁을 계획해 연이어 전쟁비용을 끌어올리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 국고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위기상황시 들 비용까지 차곡차곡 쌓을 기반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드넓은 제국의 크기와 유지비는 갈수록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가 전문화되고, 병사들의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은 늘어나는 현실에서, 필요한 고정지출 종류까지 자연히 늘어나면서 안정된 내정은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진지하게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트라야누스와 로마 제국 수뇌부들은 도미티아누스 암살 전 다키아와의 문제로 마냥 내부문제만 신경쓰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었다. 즉, 트라야누스 입장에선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고, 상황상 서기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처럼 국가재정을 꾸린다는 것은 그의 첫 대외정복전 당시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 트라야누스는 현상 유지적 속주 경영 및 원로원을 배려한 속주세 징수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원로원에게 찬사를 받아 겉으로는 문제로 지적받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트라야누스의 방법은 당대 황제와 원로원 입장만 생각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황제와 파견된 속주 총독들, 현지 유력자들이 친인척이거나 당사자이기도 한 원로원 입장에서 큰 문제거리도 없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은 로마가 전통적으로 국가 재정 및 세수체계를 꾸려 국가를 돌린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현제 중 후임 하드리아누스의 적극적 개입 혹은 전대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그리고 후대의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의 프린키파투스 국제의 황제들의 세금징수와 관리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트라야누스처럼 할 수 있어도, 굳이 세금징수업자들의 손을 더 많이 빌리지 않고, 또 원로원 입장을 일정부분만 신경쓰는 척하면서 세금징수와 대상선정을 한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즉, 트라야누스의 방법은 좋게 말하면 원로원 배려와 속주행정을 전례에 따른 합리적 운영, 현상유지를 취했을 뿐 장기적으론 그 짐을 후임 황제들에게 고스란히 청구된 문제가 있었다. 더욱이 도미티아누스 시대 후반부터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국가 재정이 속주경제에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국정 파트너인 원로원은 나날이 위상이 하락하고, 인재풀로서의 기능 역시 기사계급이나 전문 관료, 직업군인들에 비해 질적 하락이 진행 중이었다. 즉 내부적으로 로마는 이 부분에서도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현제 중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늘 이런 부분 해결에 골머리를 싸맸고, 후대의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은 트라야누스와 같은 원로원 배려보다는 적극적 명령과 속주 경제 의존성 완화를 위한 법 정비 등 다른 방법을 시행하며 내치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트라야누스는 전임 도미티아누스나 후임 황제들과 달리 현실적 이유 외에도 연이은 정복전쟁을 통한 전쟁 특수 및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도 무작정 쓰지 않은 세수 확보에 이상할 만큼 집중했다. 여기에는 트라야누스가 고대부터 19세기까지의 평가, 대중들의 이미지와 달리 최고의 황제라는 타이틀과 무색하게도 이런 내치와 국고 관리에서 평균수준의 행정가였고 그가 외치에 집중한 점도 컸다. 하지만 이런 그의 통치방법은 젊은 시절 하드리아누스로 대표되는 이들조차 우려섞인 반대가 파르티아 원정부터 나온 이유가 됐다. 또 로마 제국은 간접세가 보편적이지 않고 세금 구조가 오늘날처럼 복잡하지 않았는데, 이런 단점 외에도 서방과 동방 사이의 경제격차가 여전한 벌어져 있었고 취약했다. 로마 제국의 속주 행정 및 세수 확보가 프린키파투스 시대[* 아우구스투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까지 황제와 속주 총독 / 황제와 속주 내 유력자 간의 상호소통과 서한 교환에 기반한 방식을 사용하면서, 파견된 세금징수원과 세금징수대행업자들의 협조를 통해 집행됐지만, 이 부분에서의 고민 거리도 역대 황제들에게 큰 숙제였다. 그래서 황제가 "정부의 조세징수액이 높아지면 그러한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한계"를 방치하면, 지방세수 체제에 기반한 로마 재정은 속주재정에 더 의존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위험성이 높아졌는데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시대동안 로마 제국은 계속된 정복전쟁 외에도 황제가 기부금을 시혜하고 대규모 건축물을 만들며 국고 지출을 늘려 나갔다. 여기에 더해 트라야누스 외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전의 두 황제와 트라야누스는 세금 감면, 연체 세금 면제 등을 베풀어 내란이나 기타 비상 사태에 대처할 자금을 비축할 여력이 없는 숙제를 남겨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장 이전까지 거의 방치된 문제라고 지적받고 있다. 이런 악조건 외에도 황제들의 고민거리를 안겨준 내부 문제는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부터 서방 경제의 멱살을 잡고 끌고 있던 이탈리아와 남갈리아 일대 경제가 정체를 넘어 제 살 파먹기식으로 하락세를 탔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로마사 학자들이 세베루스 왕조와 3세기의 위기를 연구하면서, 이 시대와 오현제 시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오현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탈리아 수공업, 상업, 농업 유통망은 약속이라도 한듯 다키아 전쟁 특수가 끝나기 무섭게 내부 경쟁으로 협력이 아닌 상호경쟁 구도로 변화했다고 한다. 물론 이 부분은 갈리아 경제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지만, 이는 로마 시민권자가 가장 많은 이탈리아 내 조세 부담에 따른 피로도를 자연스레 늘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행히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오랫동안 로마, 이탈리아, 갈리아 일대 행정 전문가라서 이를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달리 경제적 위기에 닥친 이 일대의 경제규모 축소와 경제 악화를 막고 도시 경제 유지를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서방 경제와 이탈리아 경제 규모를 유지했다. 또 그는 이탈리아와 갈리아 내 블록경제 외에도 두 지역의 유통망 확대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 방법 중 많이 사용한 황제의 시혜 정책은 평시에나 꾸준히 할 수 있는 임시방편일 뿐이었고, 유통망 확보는 로마 세력 편입 전부터 부유한 지중해 동부 일대와의 경쟁에서 지중해 서부 일대 경제가 계속 밀리는 상황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즉위와 함께 내부, 외부 문제들이 봇물 터지며 위기가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오현제들의 국고를 통한 경기 부양 방법은 위기 발생 혹은 다른 지역에서 자연재해[* 지진, 해일] 등으로 위기가 닥칠 시 국고 피로도가 증가할 위험변수도 있어 이는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 개선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단점이 명확했다. 이 외에도 오현제 치하에서 로마 내 각 지역의 경제 편차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원로원 내 재산 규모 역시 이탈리아 출신과 남갈리아 출신들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특정 지역[*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일대] 내 신참자 비율이 늘게 됐다. 그리고 이는 지중해 동부와 옛 카르타고 일대를 통한 국가의 국고 의존도가 높은 현실을 더 가속화시켜 급기야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원로원 내 유력자들이 잘 사는 지역 출신들로 꾸려지는 상황까지 가속화시켰다. 다행히 이 숙제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손보기 시작해 급한 불은 끄게 되는데, 그럼에도 원로원 내 부와 권력은 여전히 아프리카 속주와 그리스 및 소아시아, 시리아 출신들 몫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욱이 대부분의 개선책들은 미완의 성공 내지 미봉책으로 불만 끈 채 콤모두스 치하에서 중지됐는데, 이는 페르디낙스 치하에서 페르디낙스가 콤모두스 시대의 악폐를 없애겠다는 명분 아래 면세, 콤모두스 시대 협력자 처단 등을 벌이며 상황이 악화되고 곡물 수습이나 조세 징수 등에서 혼란에 치닫게 만들었다. 따라서 혼란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모든 경쟁자들을 누른 이후, 이 부분에 상당히 노력했다고 해도 이런 속주경제 의존도 심화와 특정지역 경제 우월 현상은 후기 로마제국과 서로마 제국 모두에게 온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중병이 됐다.[* 오현제 시대의 폐단으로 언급 중인 원로원 내 동서간 격차 심화 부분이 조금씩 줄어든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제거하고 원로원을 개편한 이후부터였다. 이때 세베루스는 자신과 동향인 아프리카 속주와 아내 쪽 인사들이 많은 지중해 동부 편을 많이 기용했음에도 꾸준히 이탈리아와 서유럽 속주 출신 인재들의 경제력을 키워주고 그들의 의견을 대신 해결하는 노력을 벌였다. 그렇지만 이 역시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치세 후반부터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에 관해 4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손보기 전까지 사실상 방치된 오현제의 숙제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