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옥(성씨) (문단 편집) == 개성왕씨와 의령옥씨. 왕사온과 옥사온, 왕보고와 옥보고, 왕규와 옥규, 왕안덕과 옥안덕, 王(임금왕)과 玉(구슬옥) == 의령 옥씨는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개성[[왕씨]] 집안과 함께 늘 끊이지 않게 등장하는 집안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구분짓고 싶지만, 씨족의 세계관과 정체성이 송두리째 바뀌는 부분이다보니 매우 조심스러운 숙제로 남아있다. [[옥사온]](玉斯溫)은 고려시대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서 왕사온(王斯溫)과 [[옥사온]](玉斯溫)은 동일한 번호에 등재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신라]] 시대에 존재했던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집안의 존립이 가능했다. - 왕산악(王山岳)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신라고기(新羅古記)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시대 [[거문고]]의 제작자이자 [[거문고]] 연주의 대가 - 옥보고(玉寶高)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통일신라]] 시대 [[거문고]]의 대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제24대 [[양원왕]](재위 545~559)때 왕산악(王山岳)은 진(晉)나라에서 보낸 [[칠현금]](七絃琴)을 완전히 뜯어 고쳐 6개의 줄로 된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옥보고(玉寶高)--[* 삼국사기 번역본이 아닌, 원본에 표기된 이름 재검토 필요.]는 [[신라]] 35대 [[경덕왕]](재위 742~765)때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주하며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 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의령옥씨 족보에는 고려시대 이전 인물은 시조 옥진서 외에는 나와있지 않으며, 오류일 수 있지만 옥보고가 왕보고(王寶高)로 표기되는 자료가 존재한다. 1986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양음악연구소에서 '민족음악학, Vol.8, pp. 137-153'[* 학술논문: 倭政下 定期刊行物 所在 - 國樂關係記事 (2), 학술지정보: 서울대학교 동양음악 1986 8권 137p ~ 153p (ISSN 1975-0218)]로 발행되어, 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86813|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에 pdf 파일[*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86813/1/10.%20%E8%B3%87%E6%96%99%20%20%EC%99%9C%EC%A0%95%ED%95%98%20%28%E5%80%AD%E6%94%BF%E4%B8%8B%29%20%EC%A0%95%EA%B8%B0%EA%B0%84%ED%96%89%EB%AC%BC%20%28%E5%AE%9A%E6%9C%9F%E5%88%8A%E8%A1%8C%E7%89%A9%29%20%EC%86%8C%EC%9E%AC%20-%20%EA%B5%AD%EC%95%85%EA%B4%80%EA%B3%84%EA%B8%B0%EC%82%AC%20%28%E5%9C%8B%E6%A8%82%E9%97%9C%E4%BF%82%E8%A8%98%E4%BA%8B%29%20%282%29.pdf|10. 資料 왜정하 (倭政下) 정기간행물 (定期刊行物) 소재 - 국악관계기사 (國樂關係記事) (2).pdf]]]이 등록되어 있다. 이 pdf 파일의 15번 페이지 또는 종이 151쪽[* 王山岳이 創作하여 얼마가 지난後 新羅사람의 王寶高가 地理由 雲上院에 들어가 學琴 五十年에 또한 作曲까지 三十餘曲이나하여 得이라는 그 弟子에게 傳하고 得은 이를 또 貴金先生에 傳했는데 이貴金先生亦是 地理山에 들어가 나오지않음으로 羅王이 琴道의 斷絶 크게 憂濾하야 伊後允興에게 南原公事를 맡기고 貴金先生의 音을 傳得하려하였습니다. (번역: 왕산악이 창작하여 얼마가 지난후 신라사람의 왕보고가 지리유 운상원에 들어가 학금 50년에 또한 작곡까지 30여곡이나하여 득이라는 그 제자에게 전하고 득은 이를 또 귀금선생에 전했는데 이귀금선생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않음으로 라왕이 금도의 단절을 크게 우려하야 이후윤흥에게 남원공사를 맡기고 귀금선생의 음을 전득하려 하였습니다.)][* 王斯溫의 作曲한 三十曲은 아래와 같습니다.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嵒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入實相曲一 幽谷淸聲曲 降天聲曲一 (번역: 왕보고의 작곡한 30곡은 아래와같습니다. 상원곡1, 중원곡1, 하원곡1, 남해곡2, 기암곡1, 노인곡7, 죽암곡2, 현합곡1, 춘조곡1, 추석곡1, 오사식곡 원앙곡1, 원호곡6, 비목곡1, 입실상곡1, 유곡청성곡 강천성곡1)]을 보면, 옥보고(玉寶高)가 아닌 왕보고(王寶高)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86813|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의 글에 '轉載에 있어 본래의 철자법과 띄어쓰기를 그대로 따랐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 국회도서관 사이트[* [[https://dl.nanet.go.kr/search/searchInnerList.do?queryText=%EC%98%A5%EB%B3%B4%EA%B3%A0%3AALL_NI_TOC%3AAND&query=%EC%98%A5%EB%B3%B4%EA%B3%A0|국회도서관 사이트]]]에 옥보고(玉寶高)로 등록된 자료들[* '옥보고의 행적과 업적 검토', '옥보고(玉寶高)의 금도(琴道)와 선도(仙道) / 權五聖']은 2002년 자료인 것으로 보아, 고증자료와 지역, 실제 문화재에 세겨진 이름 등을 토대로 수십년간 고민 끝에 옥보고(玉寶高)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것 같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실존했던 [[왕규(1142)]](王珪)와 옥규(玉珪)는 동명인(同名人)인 것으로 보인다. - 옥규(玉珪): 의령옥씨 종파계보도에는 안 나오지만, 의령옥씨 가문의 중요인물로 소개되는 한 사람이며. 시호(諡號)는 장경(莊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 - [[왕규(1142)]](王珪)(1142~1228): 고려의 문신. 자는 숙개(叔玠)이고 원래 이름은 왕승로(王承老)다. 시호는 장경(莊敬)이며, 신종 때 여러 번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를 역임. 왕규는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인 왕만세(王萬歲)'의 7세손 [[왕충(1078)]](王冲)(1078~1159)의 아들이며, 1142년에 태어나 1228년에 사망한 개성왕씨 집안의 인물이다. 우연히도 의령옥씨 종파계보도에 존재하는 옥여(玉汝)가 평장사(平章事)인데, 이를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존재한다. *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할 수 없어 고려(高麗)조에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1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 옥여(玉汝)를 1세조로 하는 계통으로 나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옥은종(玉恩宗)을 1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이면서 의령옥씨 종파계보도에 존재하는 [[옥사온]](玉斯溫)의 아버지인 옥안덕(玉安德)은 왕안덕(王安德)으로 추정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9120|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안덕(王安德)]]] 사이트에 의하면 왕안덕은 1392년(공양왕 4)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 재위기간이랑 일치한 것으로 보아, 왕안덕은 이성계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옥사온]]의 동생인 옥사미(玉斯美)'의 아들 옥고(玉沽)(1382~143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661|옥고(玉沽)(1382~1436)]]] 또한 옥고(玉沽)의 출생일과 사망일을 대조해보면, 왕사온(王斯溫)과 [[옥사온]](玉斯溫)으로서 남긴 백부의 과거급제 날짜와 왕안덕(玉安德)의 인물로 사망한 옥안덕(玉安德) 할아버지의 사망일이 연결된다. 그리고 의령옥씨 8세손인 옥고(玉沽)의 고조 할아버지이자, 의령옥씨 4세손인 옥성(玉成)은 개성왕씨 집안의 '왕성(王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5ETC_A9999_1_0018418&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왕성(王成)(?~1178)]]](생년미상~1178년, 고려 명종8년)'으로 성은 다르지만 같은 이름의 인물이 존재하며, 여기에 더해 의령옥씨 4세손 옥성(玉成)의 밑에 있는 5세손 '평장사(平章事) 1세조로 하는 옥여(玉汝)'가 왕규(王珪)인 것이 맞다면 왕규의 출생사망년도(1142~1228)와 왕성(王成)(생년미상~1178)으로 추정되는 옥성(玉成)은 모두 같은 시대의 인물들로 연결된다. 만일, 의령옥씨 4세손 옥성(玉成)이 왕성(王成)으로 동명인(同名人)이라면, 태조왕건으로부터 왕성까지 내려오는 계보도는 아래처럼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옥성과 왕성이 우연일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참고용으로만 봐야 된다. * 고려 제1대 국왕 [[태조왕건]](877~943)(재위기간: 918~943) →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 [[왕욱]](王郁)(?~996) → 고려 제8대 국왕 [[현종(고려)|현종]](992~1031)(재위기간: 1009~1031) → 개성국공(開城國公)·평양공(平壤公) [[정간왕]](靖簡王)(1021~1069) → 경안공(敬安公) [[낙랑공|왕영]](王瑛)(1043~1112) → 승화백(承化伯) 왕정(王禎)(?~1130) → 한남백(漢南伯) 왕기(王杞)(?~?) → 신안후(信安侯) [[신안후|왕성]](王珹)(?~1178) 한자에서도 [[王]](임금 왕)과 [[玉]](구슬 옥)은 우연하게도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사전]][* [[https://hanja.dict.naver.com/|네이버 한자사전 사이트]]]에는 한자 王은 王(임금 왕)과 王(옥 옥)이라는 단어의 뜻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玉이라는 한자에서도 玉(구슬 옥) 뿐만 아니라, 玉(옥 옥)이라는 단어의 뜻을 표기하고 있을 만큼 서로서로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정말로 우연에, 우연이 집합되었다고 했을때. 씨족으로서 조상을 섬기는 부분에 매우 중대한 문제가 생기므로, 아직까지는 더 면밀히 파악하고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