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옥추경 (문단 편집) === 한국에서 옥추경의 역할과 변화 === 이 땅에 옥추경이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늦어도 14세기 [[고려]] 말에는 전해졌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소격서]]에서 도교의례를 맡았다.[* 관리들을 뽑을 적에 옥추경을 시험과목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16세기에 소격서가 혁파된 이후 민간으로 퍼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옥추경의 경문만 퍼지고 소격서에서 사용하던 의례의 법식은 잊힌 모양이다. 소격서가 사라진 뒤에도 사대부나 왕실 사람들 사이에서 옥추경은 도가의 영험한 책으로 통하였다. 성리학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정도라고 교육받으면서도 옥추경의 위명에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16세기 [[허균]]이 지은 소설 <장산인전張山人傳>에서 주인공 장산인은 <옥추경>과 <운화현추運化玄樞>란 책을 수만 번 읽은 끝에 귀신을 부리고 요괴를 내쫓는 신통력을 얻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 28년(1752) 겨울에 [[사도세자]]는 옥추경을 공부하겠다고 읽어보고는 정신이상이 생겨서 보화천존이 눈 앞에 보인다고 [[환각]]을 호소했고 '옥추'라는 단어만 보아도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고 떨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옥추경을 두고 '원수'라고 표현하였다. 옥추경을 비롯한 도가의 경문들은 경국대전주해부터 전록통고, 대전통편까지 확인된다.[* 도류(道流) 금단(禁壇)을 암송하고, 영보경을 읽으며, 연생경, 태일경, '''옥추경(玉樞經)''', 진무경, 용왕경 중 3경을 선택하여 의미를 설명하게 한다.] 사대부나 왕실에서도 이러한데 민간에서는 오죽했을까? 근대화 이전에는 이른바 '경쟁이'들을 불러 옥추경을 낭송케 함으로써 집안에 깃든 잡귀를 물리치고 우환을 없애려는 의례가 대중 사이에서 흔했다. 경쟁이들은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중국 당나라 때 나온 불교의 위경.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재앙을 없애는 경전으로 통한다.]이나 <[[천수경]]千手經> 같은 여러 경문을 외웠지만, 가장 기본이자 가장 주력으로 삼는 것은 옥추경 하나였다. 19세기 초에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명나라 왕세정이 옥추경을 두광정이 지은 위경이라 주장했음을 그의 역작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인용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2 도장잡설 편에서 옥추경의 이본들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누군가가 주장하기를 시중에 돌아다니는 옥추경은 '소옥추경'이요, 따로 '대옥추경'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규경도 대옥추경 실물을 보지는 못하였는데, 대옥추경을 이야기하는 자가 입으로만 허풍을 떨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옥추경의 판본들을 구하여 비교해보았던 모양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도교 문서에 포함된 옥추경과 불교 문서에 포함된 옥추경이 따로 있는데, 두 판본이 서로 내용이 달라 어느 쪽이 진짜인지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이규경 시절까지만 해도 조선에서 옥추경의 판본들이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유통되었고 내용도 상당히 차이가 컸던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된 옥추경의 옛 판본들은 대개 사찰에서 목판인쇄로 찍어낸 것이다. 명백한 도교경전을 절에서 인쇄했을 정도니 수요를 알 만하다. 이규경이 저서에서 불교 문서에 포함된 옥추경이 있다고 언급했으니, 그 또한 사찰에서 목판인쇄로 찍어낸 옥추경을 접해보지 않았을까. <옥추경 연구>(2006)에 따르면 옥추경은 민간에 전승되면서 판본이 여러 형태로 변화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옥추경의 판본들 중 대표적인 것은 [[무등산]] 안심사본(安心寺本, 1570), [[진안군|진안]] 반룡사본(盤龍寺本, 1612), [[묘향산]] [[보현사]]본(普賢寺本, 1733), 그리고 [[계룡산]]본(鷄龍山本, 1888)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퍼진 옥추경은 중국 판본과 비교하면 일부 장이 빠진 파본이고, 아마도 구한말 무렵에 누군가가 내용을 덧붙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누군가가 옥추경에 기존에 없던 옥추령부(玉樞靈符)라는 부적 도안을 추가했는데, 여기에는 일본 연호 [[다이쇼]](大正)가 들어가서 헛웃음이 나온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또한 1920년대에 교도들에게 옥추경을 읽게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크게 일어난 증산계 종교와 비교해도 독특했지만,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도꾼'들의 방식을 변형한 것이라 한다. [[증산 계통의 종교]]인 [[태극도]](太極道)[* 일제강점기에는 무극도(无極道)란 교명을 사용하였으나 일제에게 해산당하고, 광복 이후에 교단을 재건하며 '태극도'라고 바꾸었다.]의 창교주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는 1925년 (오늘날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영대(靈臺)라는 건물을 완공하며 [[강일순|강증산]]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라는 명칭으로 모셨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친숙했던 옥추경의 권위를 강증산과 연결 지은 것이다. 강증산이 1909년 음력 6월 24일에 사망했는데, 음력 6월 24일은 보화천존의 탄신일이라고 전하는 날이기에 더욱 관련 짓기가 쉬웠을 터이다. 태극도가 [[대순진리회]]의 모체 격인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대순진리회 신자들도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호칭이 너무 길기에 흔히 '구천상제'라고 줄여 부른다.[* 조철제가 강증산을 보화천존과 연결 지음은 옥추경의 권위를 입히려는 의도였겠지만 현대에는 오히려 관련 교단에게 문제가 되었다. 옥추경 내용에 따르면 보화천존은 고위신격이긴 하지만 최고신은 아니다. 만약 강증산이 옥추경의 보화천존이라면 [[원시천존]] 같은 도교 최고신과는 무슨 관계가 되는가? 원시천존의 하위신격이란 말인가? 이 문제가 대순진리회 교단을 괴롭혀서 교단이 옥추경의 학술연구를 지원한다.] 유튜브에도 옥추경을 낭송하거나 관련 의례를 설명하는 영상들이 여럿 올라왔다. 충청도 앉은굿에서는 지금도 옥추경의 보화천존과 부하 신장의 이름을 한자로 써서 내걸고 옥추경을 낭송하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현대 한국의 무속에서도 무속인 치고 옥추경을 안 접해본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이고 또한 중요하다. 2015년 개봉작 영화 [[사도(영화)|사도]]에서 작중 맹인박수 역을 맡은 배우 정해균이 무속인에게 옥추경 독경법을 배워서 읊었다. 역시 2015년 개봉한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제천법사가 구병시식(救病施食)을 하면서 읊은 경문 또한 바로 옥추경이다. 여담으로 주문을 [[한문]]으로 운율을 맞춰 읽으면 상당히 분위기가 있어서 선호된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