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달 (문단 편집) ==== 추측1: 하급 귀족 혹은 몰락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 ==== 보잘것 없던 하급 귀족으로 후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서 [[부마]]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 때 온달은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당서]]에 나타난 [[고구려]] 12관등 중 6등급의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이렇게 대단한 전공을 세우고 관직이 이 정도에 그쳤다는 것은 온달이 하급 귀족이라는 유력한 증거라고 본다. 만약 귀족이 아니었다면 고구려 사회에서는 대형 관직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하급 귀족이나 몰락한 귀족의 자손 정도는 될 것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렇게 등급은 낮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평원왕]]의 총애를 받고 [[부마]]가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구려]]의 고급 귀족들이 이를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뒤에서 비꼬면서 바보 온달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당시 평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결탁했는데, 이들은 기존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하급 귀족들 출신들일 수밖에 없었고, 온달도 그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단순히 출신이 미천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관직을 받고 부마가 되었을 온달이 기존 세력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을 것이다. 역사학자 이기백(1924~2004)은 1967년 '백산학보' 제3호에 기고한 '온달전의 검토'에서 온달이 받은 기록상 최초의 관등이 대형(大兄)임을 근거로 비슷한 추정을 내놓았다. 대형의 등급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제각각이라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형은 12~14개의 전체 관등 중에서 2~7관등 정도였다. 이를 근거로 이기백은 "대형이라는 관직을 차지하려면 일정한 신분의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왕실과 자연스럽게 결혼할 수 있는 고급 귀족은 아니었더라도 하급이나마 귀족의 범주에는 들지 않았겠느냐는 게 그의 추정이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47&aid=0002304907|#]] 박인호 한림대 박물관 연구원은 "온달을 통해 본 6세기 고구려 귀족사회"라는 논문을 통해 "온달이 처음으로 받은 관직은 '대형(大兄)'으로 고구려의 7번째 관직"이라며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 [[연남산]] 등도 대형을 거쳐 [[막리지]]에 오른 것을 고려할 때 온달의 신분은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6세기 전반 고구려에서 국내성파(옛 수도)와 평양성파(신 수도) 사이에 벌어진 내란 수준의 정계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잃은 국내성파 출신 귀족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우하게 묘사된 환경도 정치적으로 몰락한 온달 가문의 신세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왕으로서는 외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력을 결집할 필요가 있었고 온달로 대표되는 국내성파에게 화해의 손길(국혼)을 내밀었다고 주장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01821#home|#]]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