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돌 (문단 편집) == 역사 == 일반적으로 기원전 4세기 [[옥저]] 시대부터 온돌이 발명되었다고 추정한다. 실제로, [[구석기시대]][[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65082417|#]]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이미 온돌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형태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때는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구당서]]에서 나온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습속이 유사하다.'라고 이야기하므로 [[백제]]에서도 이미 온돌의 초기 형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당시의 온돌은 방 일부만 데우는 ㅡ자나 ㄱ자 형태였고, 이후 [[고려 시대]] 중기로 와서 현재의 방 전체를 데우는 온돌의 구조가 완성되었다. 이런 문화가 발달한 경위는 특유의 기후 때문이다.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인데, 보통 뚜렷한 것도 아니고 꽤 극단적으로 뚜렷하다. 이게 사실 그다지 사람 살기 좋은 여건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극단적인 사계절 덕분에 여름의 높은 기온을 이용하여 단위 면적당 열량 생산량이 가장 높은 작물인 쌀 농사가 가능했고 반대로 추운 겨울에는 추위에 약한 해충과 잡초가 얼어죽게 되어 생산성 역시 높일 수 있었다. 3모작이 가능한 동남아가 무조건 쌀 생산에 유리할 것 같으나 여기는 겨울이 없는 기후 때문에 해충과 잡초가 끊이지 않고 벼를 괴롭힌다. 한국과 동남아의 쌀 농사는 이런 점에서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연중 최고, 최저온도가 '''50도''' 이상 차이 나다보니 겨울은 너무 추워서 난방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고, 여름은 너무 더워서 냉방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거기에 여름은 습하고 겨울은 건조하니 겨울과 여름을 둘 다 날 수 있는(=짓기 어려운) 집이 있어야 하는 극단적인 기후다. 이런 이유로 여름을 버티기 위해 일부러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 보는 이른바 '배산임수'형 주거지가 발달했는데 그 목적은 강바람이 정면에서 들어오고 이 바람이 뒷면의 산을 통해서 집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겨울에는 온돌이라는 난방 수단을 이용하여 버텨내야만 했다. 그동안 문헌 중심의 연구에 의하면, [[13세기]] 전기에 개경을 중심으로 중상류층의 기거처에 온돌 사용이 보편화되었다고 본다. 고려 말기에 비로소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온돌이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지방에 위치한 말흘리 고려시대 건물지에서 이미 온돌과 방이 연접되어 설치된 건물들이 확인되어 12세기 이전에 한반도 남부지역의 중상류층의 가옥에서도 온돌이 보급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온돌방과 마루가 연접되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역시 12세기의 실증유구가 발견됨에 따라 그간의 연구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까진 기본적으로 하층민 문화로서 화덕을 이용하는 상류층은 잘 채용하지 않았다. 종묘제례나 군대 훈련 등으로 상번하는 사람들의 임시 거처마저 온돌을 설치하니 낭비가 심하다는 식의 상소가 올라온 기록도 실록에 남아있으며 [[조선]] [[영조]] 때의 기록까지도 당시 궁궐에도 온돌이 많이 없었는데, 왕의 편전인 [[창덕궁]]의 [[창덕궁 희정당|희정당]] 역시 온돌방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편 나인이나 내관들이 추위를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임의로 건물을 온돌식으로 개조하였는데, 이로 인해 땔감을 공급하는 백성들이 곤란을 겪었다는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37/0000023099|이야기]]도 있다. [[경신대기근]]을 불러온 17세기 [[소빙하기]]를 겪으면서 난방은 생존의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온돌이 본격적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나무땔감의 수요량이 급증하자 조선의 산림자원은 급속히 고갈되어 갔고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민둥산이 아닌 산이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진행되어 조선 말기에 이르면 실록에서 다량의 벌목으로 인한 토사유실로 인한 농업생산성의 저하 문제를 논의할 정도에 이른다. 이 당시에는 석탄 채굴이 대규모로 활성화되지 않았던 것도 산림자원 황폐화의 큰 원인이었다. 당시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면서 인구 증가와 목재 수요 증가로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의 산림은 [[http://shaind.egloos.com/5373584|고갈]]되어가고 있었다. 조선의 경우는 인구의 증가뿐 아니라 온돌이 보급되면서 더더욱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더욱 심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18세기 조선에서는 산림의 소유권을 둘러싼 송사인 산송(山訟)이 증가한다. 또 조선 정부도 산림 보호를 위한 금산(禁山) 규제와 정부 주도로 비변사와 각 지방 군관을 동원한 대규모 나무 심기를 [[http://sldn84.egloos.com/2697424|시행]]하였다. 1788년에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산림법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8248&cid=46631&categoryId=46631|송금사목]]을 제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와 나무 심기에도 불구하고 급증한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조선 후기가 되어 상당한 삼림의 고갈을 겪는다. 물론 당시라고 해서 석탄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석탄매장지가 주로 험한 산악지대인 특성 때문에 운반하는게 쉽지 않았던지라 보편화되지못했다. 일본과 유럽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나 일본은 [[홋카이도]] 개척을 통한 외부 지역의 목재 공급,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과 기타 해외 식민지에서 목재 공급을 통한 수요 충족과 [[석탄]]사용을 통한 목재연료 사용 감소를 통해 산림 고갈을 해결하게 된다. 무엇보다 한반도와 달리 강수량이 고른 기후라 자연적 회복도 빠른 편이었다. 물론, 조선시대 한반도의 산림이 전부 다 고갈된 것은 아니고 [[개마고원]] 일대나 [[백두대간]] 지역처럼 인구가 적거나 평상시에 사람이 드나들기 쉽지 않았던 지역에는 숲이 남아있었지만[* 그 기준이라는 게 굉장히 척박하다. 한라산의 경우도 20세기 중반만 해도 해발 1000m이하로는 나무가 없다시피 했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굉장히 깊은 산림조차 사실 연령이 매우 낮은 산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평지나 나지막한 산에 있던 숲이 많이 파괴되었기에 조선 전체로 보면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산림파괴로 임자원은 거의 고갈되었다. 그렇기에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벽돌 건축을 찬양하며 한국식 온돌의 단점을 비판했는데, 황토와 돌로 만들면 돌에 바른 황토의 두께에 따라 온도가 균일하지 않고 열이 여기저기서 새어나가지만 벽돌로 만들면 수수깡 몇 줌으로도 집안 전체를 달구기 좋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여기엔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정작 그 청나라는 온돌 기술이 없어서 청나라 황제 건륭제도 난방하기 위해서 방안에 화로를 놓고 숯을 태웠다. 정말로 청나라의 벽돌 건축이 온돌 사용에 효율적이었을지는 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동시대 인물 성대중도 [[청성잡기]]를 통해 무리한 벌목으로 인한 산림파괴와 젊은이들이 온돌 때문에 게을러진다고 지적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일본 침략기]]의 산림 수탈과 [[6.25 전쟁]]까지 겪으면서 더욱 숲이 황폐화되고 1950년대까지도 가정용 연료에서 신탄(나무)의 비율이 80%에 달하는 [[http://www.gwangyang.go.kr/images/01kr/economy/06050502_52.pdf|상황]]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1950년대 신문 사회면에는 '도벌' 관련 기사가 가끔 보인다. 한 마디로, 나무를 허가받지 않고 몰래 베는 도둑질이다. 기사를 읽어보면 상당한 중범죄로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1970년대부터 내무부[* 현재의 [[행정안전부]]인데 내무부 직속으로 산림청을 두었다. 녹화사업을 정부시책으로 추진해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힘을 실어준 결과.]에서 중점적으로 산림 [[녹화사업]]을 벌인 결과 한반도 남쪽 숲은 거의 회복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무의 대체제로써 연료를 [[연탄]]으로 대체하는 사업을 벌이며 태백, 화순 등 전국에 산재한 석탄자원을 활용하고자 석탄개발공사를 세우고 채굴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2차대전 이후 황폐해진 숲을 복원한 모범사례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산림녹화다.[* 다른 사례로는 독일이 있는데 독일의 경우는 기존 공업지대 자체가 서부 라인-루르 탄전 위에 세워져 있었고, 또 녹지는 다량 확보했으나 과거의 울창했던 숲을 완벽히 복원한 것은 아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FX6zSlAWuPQ|(대한민국의 산림녹화 설명)]] 세계 여러나라에서 산림녹화를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대체연료를 제때 보급하지 못해 덜 자란 나무들까지 벌채하는 경우가 잦다. 북한의 경우도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인데 우리가 남북협력으로 나무를 심어줘도 금세 땔감으로 잘려나간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주거 목적의 [[한옥]] 건물들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2층 이상이 없는 단층집만 있는 가장 큰 원인이다. 온돌의 무게와 비용이 대단했고 온돌 없는 2층 집을 짓느니 온돌 있는 1층으로 만족한 것이다. 하지만 온돌이 확산되기 전인 고려~조선 전기까지는 일반 주택에도 다층 건물이 상당히 있었다고 한다.[[http://luckcrow.egloos.com/2541851|참조]] [[고려도경]]에서도 개성의 건물 열 개 중 하나는 복층 건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종종 낮은 복층 구조의 조선조 건물에는 다음과 같이 구들이 설치되기도 한다. [[파일:external/www.k-heritage.tv/8_2.jpg]] [[파일:external/www.k-heritage.tv/11_2.jpg]] [[김천]]의 방초정.([[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story/view.do?contentsSeq=8305&categoryType=2|출처:문화유산채널]]) 정자 가운데 돌기둥처럼 된 부분이 구들이고, 위에 온돌방이 있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c0073935_56f9fcd859639.jpg]] 뜬구들([[http://brainage.egloos.com/5867506|출처]])의 모습. [[개화기]] 당시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한 뒤 남긴 기록 중에 온돌에 대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벽난로에 비해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칭찬 외에도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712/read/22525011|'조선인들은 빵처럼 구워지는 것을 좋아한다.']][* 스웨덴의 아손 그렙스트, <100년전 한국에 가다> 中], '용광로에서 잠을 자는 기분이었다.' 등 특이한 묘사들도 많다. 당시 조선에서는 손님이 오면 아랫목을 내주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불을 더 때주는 풍습이 있다고 당시 조선에 파견 온 러시아 군인들이 기록했다.[* V.P 카르네프 대령, <내가 본 조선인> 中. 당시 너무 더워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에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너무 뜨거워 문을 열었는데, 주막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호환(재해)|호랑이가 물어간다]]면서 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문을 여는데 성공해도 당시 조선의 겨울은 너무 매서워 온돌 바닥은 뜨거운데 공기는 차가워서 괴로웠다는 기록도 있다. 입식 생활의 난방과는 다른 난방 체계에 큰 인상을 받은 듯. 평균 온도가 33도에 40도에 육박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이 정도면 한여름 열대야 기간의 실내 온도를 방불케 하는 수준. 실내 온도가 29도만 넘어도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잠을 설치기 일쑤다.] 외국인 입장에선 상당히 고역이었을 것이다. 전통 온돌방은 기름종이로 된 장판지를 구들 위에 바른 뒤 콩기름을 덧바르는 콩댐을 하거나 [[송진]]을 덧발라 송진장판을 만들어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8620&cid=1648&categoryId=1648|방수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 온돌방은 [[비닐]] [[장판]]을 깔아서 한국인에게 방바닥 기본 속성이 방수성 및 내수성이다. 비닐 장판은 사실 [[보일러]]처럼 '''역수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서양에서 아마씨 기름을 굳혀 만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89402&cid=40942&categoryId=31891|리놀륨]]'''이 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